예레미야 18:1-11 주석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질문이 뒷배경에  깔려 있습니다. 이 질문은 친근하게도, 혹은 도전적으로도 물어볼 수 있는 질문입니다. 예레미야 18장에서는 도전적인 방식으로 질문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누구시라고 생각하실까요? 답은 “자신의 뜻대로 우리를 빚으시고 만드시는” 토기장이입니다. (인용구는 고전 찬송가, “Have Thine Own Way, Lord”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누구라고 생각했을까요? 답은 토기장이에게 저항하는 토기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인류 역사의 중심에 있는 서로 경쟁하는 의지들의 강력한 한 예를 보게됩니다. 물론 제가 말씀드리려는 바는,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모든 주권을 가지신 주님과, 최초의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며 (창세기 3장)”라는 감질나는 약속을 깨물었을 때 존재하게 된 주권자 사이의 싸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8장에서 우리는 그러한 경쟁의 신비와 비극에 대한 독특한 통찰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암울한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유다에게 다가 올 심판의 운명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암울한 메시지의 궁극적인 목적은 회개에 이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예레미야의 선포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다음에 등장하는 구절들을 읽어보면 유다의 지도자들은 오히려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유다가 주의를 기울이고 회개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예레미야에게 실물 교훈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계속 이어 가신 전통처럼, 하나님은 고대 생활의 평범한 부분을 사용하여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 주리라.”

토기장이의 집에 내려 간 예레미야는 토기장이가 하는 일상적인 일들을 봅니다. 토기장이는 진흙 조각을 가지고 일종의 토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 진흙에 일부 문제가 있어서 토기장이의 의도대로 토기가 만들어지지 않자, 토기장이는 그 진흙을 다시 반죽하여 다른 토기를 만들고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여기서의 메시지는, 토기장이에게는 그 진흙 덩어리에 대한 절대적인 통제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그 진흙으로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좋아 보이는 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은 다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주장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라는 진흙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좋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만드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21세기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메시지로 보입니다. 가장 경건한 사람들, 정말로 특별히 가장 경건한 사람들이라도 마음껏 하나님께 도전하고, 하나님과 논쟁하고, 하나님께 화를 내고,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자신과 동등하게 대하는 시대에, 이와 같은 메시지는 우리의 손을 떠나 거부되기  쉽습니다. 그것은 천상의 컴퓨터의 공격 버튼 위에 손가락을 얹은 아주 예민한 성격의 CEO이시며, 화난 폭군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오래된 이미지를 연상케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선포되지 않는 한 이와 같은 본문에 대한 설교를 환영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본문에서 그려지는 그림은, 심판만 하려는 폭군이 아니라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진흙 조각을 가지고 다시 시작하시는 토기장이라는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면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고려하지 않는 하나님의 주권의 한 측면입니다. 변덕스러운 절대 권력의 통제가 아니라 결점이 있는 백성에게 유익이 되도록 그의 계획을 기꺼이 변경하시는 은혜로운 의지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서 이 치명적인 결점을 발견하셨을 때 단순히 그들을 부숴뜨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새롭게 시작하십니다. 그분이 하시려는 일의 결국은 그의 백성들이 그들에게 내려진 심판에 대한 선포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본문의 수수께끼 같은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가지고 계심을 분명히 선언하신 후,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조건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7-10절에서 “만일”이라는 단어를 네 번이나 사용하셨습니다. 주권자인 주님은 그의 백성들이 행동을 바꾸면 그분의 계획도 바꾸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은 무엇입니까? 변하기 쉽고, 조건적이며, 불확실한 것입니까?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는, 절대 주권에 대한 이야기가 초세속주의자들을 광적으로 분노하게 하는 것처럼 초칼빈주의자들에게 혼란을 가져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생각을 변화시킨다는 이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하나님은 불변하시지 않습니까? 이것이 고전적인 “단순성” 교리의 핵심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면 왜 하나님께서 변하셔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단순히 그의 계획에 조건을 포함시키지 않으셨을까요?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마음을 돌이키시고, 재고하고, 심지어 회개하는 것처럼 보이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우리의 유아적 이해에 자신을 맡기시는 꼴이 될 것입니다 (칼빈의 유명한 조정 교리). 그러나 하나님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영원부터 정해져 있습니다.

그렇죠. 그러한 설명은 확실히 중요한 교리를 옹호하지만, 그것이 이 본문의 실제 용어들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본문들—출애굽기 32:12, 14, 아모스 7:3, 6, 요나 3:10).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선택에 부여하신 어마어마한 중요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일입니다. 이 본문은 이스라엘의 운명이 자기 손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기 내 계획이 있다. 그러나 네가 행동을 바꾸면 내 계획도 바꾸겠다.

이 말이 인간 자신이 궁극적으로 주권적이며 토기 자체가 자신의 삶의 책임자라는 것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일부 학자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주권으로 하나님의 계획 안에 두려운 (혹은 고무적인) 역할을 인간에게 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생명이 없는 무감각한 진흙 조각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생각과 의지와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통제권을 넘겨주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다스림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계획을 실행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너무 복잡해 보일 수 있지만, 성경을 관통하는 실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시고 명령하시고 초대하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너는 내 것이고 나는 네가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복종하고, 나를 신뢰하기를 바란다. 네가 만일 그렇지 않으면 불과 어둠과 죽음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너를 파괴할 수 있지만,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돌이켜 내게로 돌아오길 바란다. 나는 네가 다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행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돌아올 것을 선택해야만 한다. 네가 만일 그러한 선택을 한다면, 나는 내가 하려한 일들을 그만 둘 것이다. 대신에,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 곧 너를 축복하고, 세우며, 심고, 구원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 모든 복잡한 (우리에게는 혼란스럽게 보일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간단하고 직접적이며 파괴적인 경고로 끝내십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세워 너희를 치려 하노니.”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직접 말씀하신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는 충분히 오래 참았다. 이제 끝이 왔다. 너의 창조주, 토기장이를 만날 준비를 하라. 네가 돌아서서 내게 돌아올 기회는 더 이상 없다.” 그것은 절망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일을 끝내시는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경고를 분노의 느낌표로  끝내지 않으시고 또 다른 초대로 끝을 맺습니다.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나님은 출애굽기 34:6,7에서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중요한 계시를 전하고 계십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물론 그 본문은 뒤이어 이렇게 말씀합니다.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그리고 바로 그것이 이스라엘이 현재 예레미야서에서 서있는 위치입니다. 유죄, 유죄, 유죄입니다. 하지만 죄책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직 완전히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12절의 요점입니다. 7-10절의 모든 “만약”들과 돌이키시고 재고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과 새 삶의 모든 가능성들, 이 모두는 논의할 가치가 없는 일들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그들의 죄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

“헛되다”는 말은 하나님을 향한 반항의 표현(“하나님, 당신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 상관없어요!”)이거나, 절망의 표현(“우리는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너무 멀리 갔습니다”)일 수 있습니다. 아뭏든 결과는 동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이든 상관 없이 우리의 계획을 따를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악하고 완고하기 때문에 이런 고대에 행해졌던 의지의 투쟁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주권자라고 주장하실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주권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지옥에나 가세요.” 맙소사. 그렇습니다. 신성모독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이스라엘과 마침내 그렇게 끝낸 것에 대해 하나님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끝내지 않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그럴 수 없습니다. 끔찍한 형벌이 있었지만 70년 동안만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갈등은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충격적인 일을 행하실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태초에 흙으로 인간을 빚어내신 일과 맞먹는 극적인 일처럼(창 2:7),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어 진흙 덩어리가 되게 하셨습니다(요 1:14). 그렇게 하신 것은 그를 믿는 사람들이 아주 새로운 시작,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를 얻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오랜 세월 지속된 의지의 갈등에 뛰어든 그 아들은 하나님의 뜻(마태복음 26:39)과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는(행 4:28) 악한 사람들의 뜻에 자신을 굴복시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 개개인의 뜻에 관한 이 모든 문제는 여전히 불가사의한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우리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우리 자신이 계획한 고의적인 계획보다 낫다는 것을 분명히 압니다. 그것을 알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32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예화 아이디어

많은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역설을 해결하려고 시도하다 엉키고 설키게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불행하게도 교리적 일탈을 자초했습니다. 저는 순수한 시골 설교자였던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방식을 좋아한다. “하나님은 100% 주권자이시며 우리는 선택에 100%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 둘을 조화시킬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둘을 함께 붙잡을 뿐입니다. 그것은 캘리포니아 해안에 자라고 있는 두 그루의 거대한 레드우드 나무와 같습니다. 그 나무들은 함께 자라며 평행을 이루지만 적어도 우리가 볼 수 있는 한 결코 만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없는 저 위, 해양 층을 이루는 안개 속으로 그 나무들은 사라지지만 거기에서 그 나무들은 서로 만나고 가지들이 얽혀 있습니다.”

이 글의 초반부에서 저는 “Have Thine Own Way, Lord”라는 오래된 찬송가를 조금 인용했습니다. 이 찬송가가 너무 오래된 찬송가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이 찬송가에는 12절에서 묘사된 이스라엘의 태도와는 정확히 반대되는 자세를 노래하는 아름다운 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님,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당신은 토기장이, 나는 진흙입니다.

나를 빚어 당신의 뜻대로 만드소서.

내가 기다리는 동안, 굴복하고 잠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