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본문은 설교자들이 즐겨 선택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이번주의 다른 Lectionary 본문들에 비하면 (극적인 탕자의 비유–누가복음 15장 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에 대한 바울의 장엄한 교리–고린도후서 5:15-21) 여호수아서의 이 본문은 너무 보잘것 없고 하찮게 보입니다. 게다가 이 본문을 설교하면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할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 경우와 같이, Lectionary의 선택은 언뜻 보기보다 훨씬 더 현명하고 중요합니다. 사실, 이 짧은 본문은 이스라엘의 구속 역사에서 결정적이며 사순절과 관련해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5장은 광야에서 방랑하던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정복하기까지의 위대한 전환기를 나타냅니다. 40년의 광야 생활 끝에 마침내 이스라엘이 그 약속의 땅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나오게 하신 것처럼 이제는 요단강 (수 3,4장)을 갈라 젖과 꿀의 땅에서의 자유함으로 인도 하셨습니다. 다음 단계는 여리고를 정복하는 것입니다(수 6장).
그러나 이스라엘이 구속의 여정에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전에, 한 가지 꼭 처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곧 언약을 갱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언약을 무시하셔서가 아닙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겠다는 약속을 이미 지키셨고 애굽에서 그들을 구속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척박한 환경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에 발을 디뎠습니다. 여호와의 신실하신 사랑은 그들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듭거듭 하나님을 배반하고 언약을 어겼습니다. 약 38년 전에 약속의 땅 남쪽 경계에 왔을 때 가장 의미심장한 배반을 했습니다. 10명의 불충실한 정탐꾼의 보고에 겁에 질린 그들은 여호와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노예의 땅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같이 믿음이 없는 자는 약속의 땅을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믿음 없는 세대는 거의 40년 동안 방황하다가 모두 죽었던 것입니다.
그 기간 동안에는 할례나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두 가지 위대한 성례전은 쓸모 없게 되었습니다. 할례는 언약 관계를 맺는 의례였으며, 이 할례를 받은 사람이 선택받은 백성이며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언약의 축복과 의무를 위해 성별하셨다는 가시적 표시였습니다. 유월절은 기억의 의례였으며, 이집트의 속박의 권세에서 그의 백성을 구속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가시적 표징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이스라엘에게 정체성을 주었고 두 번째는 이스라엘에게 확신을 주었습니다.
따라서 광야에서 난 세대는 자신들이 진정 누구인지, 누구를 신뢰할 수 있는지 모르는 세대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의 근본적인 진리를 알지 못했다면 약속의 땅을 정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음 단계를 밟기 전에 처리해야할 몇 가지 미완성의 일이 있었습니다.
2-8절에서 여호수아는 첫 번째 일을 처리했고 9절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그 피상적인 의식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알려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포피가 벗겨진 것처럼 “애굽의 수치”도 하나님에 의해 그의 백성에게서 벗겨졌습니다. 이 구절에서 “애굽의 치욕이나 수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아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그것이 단순히 과거 노예 제도의 수치에 대한 언급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이들은 이것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애굽과 다른 나라들이 이스라엘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에게 쏟았을 수치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가 너희들을 거기까지 데려다 줄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했잖아!” 그리고 또 다른 학자들은 이것이 38년 전 남쪽 국경에서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했을 때 이스라엘이 불순종한 수치에 대한 언급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어떤 의미를 채택하든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예전 것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할례를 받은 그들의 믿음이 언약의 하나님께 새로운 헌신을 했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분이 모든 죄와 함께 그들의 과거를 지워 버렸습니다.
유월절과 그에 수반되는 행사를 기념하는 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 언약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할례가 과거와의 단절과 광야의 죄에서 끊어지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면, 유월절은 그들을 위해 새로운 미래를 여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새로운 신뢰가 포함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어린양의 피가 묻은 집들을 지나가심으로 그들을 죽음에서 구원하신 것같이 여호와께서 그들이 이 새 땅에 들어갈 때에 구원하실 것입니다. 유월절에 드러난 그분의 능력은 미래에도 충분할 것입니다.
이 새로운 날이 도래한다는 또 다른 징조로, 하나님은 40년 동안 그들을 살게 한 만나의 공급을 차단하십니다. 이제 그들은 젖과 꿀의 땅에서 자기들 손으로 얻은 소산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누룩 없는 빵과 볶은 곡식으로 검소하고 의례적으로 시작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가 올 잔치를 미리 맛보는 것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그 땅을 자기들 손으로 취한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능하신 손과 펴신 팔로 취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수 5:13-15에서 암시하듯이, 여호와의 군대를 통해 그 땅을 취하게 될 것입니다. 할례와 유월절을 통해 이스라엘은 주님의 군대의 일부로 구별되고 준비됩니다. 그들은 신성한 성례전을 준수하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주실 좋은 미래를 향한 여정으로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었습니다.
이 본문을 설교하는데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례적(sacramental) 접근 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와 빈 무덤을 향해, 우리의 구속을 향해 나아갈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를 위한 그분의 구원 역사를 상기시켜 주는 성례들을 정기적으로 거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누가 세례를 받아야 하는지, 어떻게 세례를 받아야 하는지, 언제 세례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기독교인들의 의견이 다르지만, 모든 기독교인들은 세례를 입문 의례로 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예수님께서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으로 하신 일을 기억하도록 돕기 위해 유월절에 성찬을 제정하셨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여정을 계속 하기 위해 이러한 성례들을 정기적으로 행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또 하나는 성례들이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 즉 옛 것과의 단절과 새 것을 포용하는 것에 대해 설교할 수 있습니다. 할례가 쓸모없는 포피를 베어 버리듯 우리 삶의 헛된 죄를 잘라 내자고 하며 생생하고도 불편하지만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이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과거 역사를 상기시켜 주듯이, 우리는 십자가를 돌아보고 재림을 바라보도록 하자고 하며 우리가 어떤 전투에 직면해 있던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승리로 인도하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음을 설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본문은 “오늘날”이라는 중요한 단어로 시작됩니다. 그것은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새 창조에 대한 위대한 선포 (고후 5:15-21) 이후에 한 다음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여호수아서의 이 짧지만 독특한 본문은 죄 많은 과거와 단절하고 하나님의 좋은 미래를 받아들여야 하는 긴급성을 사람들에게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년 사순절을 지내면서 쉽게 식상해 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5장은 옛 의식과 함께 그것이 항상 “오늘날”임을 상기시켜줍니다. 지금이 회개하고 믿을 때입니다! 미완의 일을 처리하지 않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마십시오.
예화 아이디어
할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은 여호수아 5장에 나오는 유대인 성인 남성들의 실제 불편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표시로 그들은 부싯돌 칼로 자신의 가장 은밀하고 민감한 부분을 잘라내야 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헌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표시입니다. 농부의 아침식사로 햄과 계란에 관련된 한 우스갯소리가 생각납니다. 암탉은 그 아침 식사에 약간의 기여를 했지만 돼지는 고통스러운 헌신을 해야만 했다는.
현대 사회에서 할례는 의학적 목적으로 수행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종교적 의식으로서의 중요성은 상실되었습니다. 할례를 NBA 신인선수 선발 행사와 비교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NBA는 전미 농구 협회입니다. 매년 프로 농구 팀들은 그들의 팀에 영입할 좋은 신인 선수들의 목록을 만듭니다. 경영진은 그 목록을 매우 신중하게 검토합니다. 최종적으로 신인 선발 행사 때 그들의 팀이 원하는 선수들 이름에 동그라미를 칩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대대로 하셨던 일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술이나 성품에 관심을 두지 않고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무조건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팀으로 선발하셨다는 표시로 육체에 원을 그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하나님의 팀, 주님의 군대, 선택된 백성에 속해 있음을 항상 기억할 것입니다. 비록 그만큼 가시적이거나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세례도 같은 의미의 표징이자 인침 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에서 얼마나 자주 구원을 식사와 함께 축하하는지 놀랍습니다. 여기 여호수아 5장에서도 보게 됩니다. 신약의 종말론적 혼인 잔치에서도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탕자의 비유를 식사로 끝내신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 불충실한 아들은 먼 나라에서 오랫동안 방황하다가 “오늘날”에 와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종의 의무가 아니라 아들로서의 영접이었습니다. 그리고 과거를 용서받고 안전하고 풍성한 미래를 의미하는 큰 잔치까지 열리게 되었습니다.
저자: Stan M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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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5:9-12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