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이사야서에서 Lectionary가 선택한 69개 본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할만한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이 진정으로 “대” 선지서라 할 수 있는 이사야서의 메시지를 잘 요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절은 이사야서의 저자와 장소와 시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1절이 우리가 이 선지자의 말을 들어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가 기록하고 있는 것은 그가 “보았던 환상”입니다. 그 기록들은 이사야가 스스로 지어낸 것도 아니고, 그의 종교적 상상력과 신학적 통찰의 결과도 아닙니다. “당신이 이제 읽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예언적 말씀입니다.
1절은 이사야가 유다의 네 왕이 통치하는 시대에 예언했음을 나타냅니다. 웃시야 왕이 죽은(이사야 6장) 해에 부름을 받아 히스기야 왕 통치까지 그의 사역은 계속되기 때문에, 그의 사역 기간은 B.C. 750년에서 700년 사이, 즉 8세기 후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넓은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면, 북왕국 이스라엘은 722년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유다는 701년에 거의 멸망되고 597년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갑니다. 이처럼 이사야는 국제적 위험이 만연한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유다는 호황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James Limburg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기원전 8세기 중반이 지난 예루살렘은 경제는 호황이었고 엘리트들은 웃시야 왕 시대의 번영을 누리고 있었고 종교 기관들은 희생제물들과 노래들로 소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수면 아래에서는 무엇인가 잘못되었습니다. 끔찍한 질병이 국가의 심장을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그것을 보았고 너무 늦기 전에 그의 백성들에게 경고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 이야기가 미국의 현 행정부에 대한 그다지 미묘하지 않은 비판처럼 들린다면, Limburg가 이 글을 쓴 때가 2001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10-20절은 유다 나라의 심장을 갉아먹는 무서운 질병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는 이사야서의 분위기에 더 잘 맞는 용어로 표현하자면, 이 구절들은 가능성이 있는 선고 지침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께서 제기하시는 법적 소송 또는 불만족스러운 부분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10-1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종교 행위를 강력하게 거부하십니다. 16-1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공의와 의를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8-2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그의 방으로 부르셔서 그들이 형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그들이 하나님의 제안을 거부할 경우 닥칠 끔찍한 결과로 그들을 위협하십니다.
유다의 종교적 관습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는 이보다 더 완전할 수 없었으며, 이는 하나님 자신이 그러한 종교적 관습들을 요구하셨다는 점을 감안할 때 놀라운 일입니다. 예언적(“여호와의 말씀”)이며 제사장적(“우리 하나님의 율법”)인 용어로 된 메시지를 언급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사랑하는 택하신 자들을, 아브라함의 날에 완전히 멸망한 전설적으로 사악한 도시였던 소돔과 고모라에 비교합니다.
이 가혹한 정죄는 이스라엘의 과도한 종교성에도 불구하고(혹은 아마도 그것 때문에)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교 용어들이 망라하여 언급되어 있습니다. 희생 제물들과 번제, 기름과 피, 수소와 어린 양과 염소, 행렬들(12절의 “밟을 뿐”), 분향, 월삭과 안식일, 지정된 절기들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모세 오경은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지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것들은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언약적 의무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런 일들에 관심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배불렀고, 기뻐히지 아니하노라,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다시 가져오지 말라,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8세기 유다의 종교적 관습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이실 수 없으십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종교 중심의 관계에서 다른 어떤 것을 중심으로 한 다른 관계에로 바꾸시기로 마음을 바꾸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종교의 핵심이었던 희생 제도를 버리셨습니까? 아니면 유다가 잘못된 종류의 동물을 드리거나 의식을 잘못 시행하여 이 종교 의식을 잘못 행했습니까? 아니면 그들이 충분히 자주 행하지 않았거나 충분히 열정적이지 않았습니까? 유다의 종교 관습에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15절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문제의 핵심이 드러냅니다. 앞의 13b절에서는 그들이 얼마나 악한지 명시하지 않은채 그들의 모임을 “악”이라고 불렀습니다. 15절은 의례와 종교의 규례뿐 아니라 마음의 기도까지도 거부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의 정죄하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이는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네, 물론 그 많은 희생을 드렸으니 그럴테죠. 그런데 아닙니다. 황소와 어린 양과 염소의 피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피, 곧 동료 이스라엘 사람들의 피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문자적 의미를 말하시는 걸까요? 아니면 비유적 의미를 말씀하시는 걸까요? 아마도 후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덜 심각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동료 유대인들을 “죽이고” 있었으며 그러한 살인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예배를 가증하게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하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규정된 의식적인 씻음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니며, 더 나아가서는 본질적인 죄의 씻음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이스라엘이 먼저 할 일은 행동의 변화가 따르는 진정한 회개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은 “약간의 물과 연약한 몇 마디의 고백으로 이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대신에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방식을 말씀하실까요? 하나님,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원하십니까? 또는 아모스 5장과 미가 6장에 함께 등장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두 단어로 말하면 “정의를 구하라”입니다. 그게 무슨 뜻일까요?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원하시는 정의는 사회 정의입니다. 단순히 고아에게 한 덩어리의 떡을 주거나 과부에게 새 옷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의 권력자들에게 압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정의는 무방비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그 약자들에게는 너무나 거대해 보이는 권력자들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말합니다. 비록, 약자들의 사건이 재판관에게 넘겨지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법정에 가는 일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입법부에서 그들의 주장을 간청하는 일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법률이 소외된 사람들의 필요를 고려하도록 말입니다.
이전에 올린 글에서 저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회 정의에 대한 이 요청을 거부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것이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약화시킨다고 그들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전도의 적으로 간주됩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사회 정의에 헌신하는 일부 사람들이 전도하는 일에는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전도를 문화적 제국주의, 혹은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거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내 믿음을 강요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 글에서 저는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정의를 추구하는 것을 수반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기를 우리가 원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제자가 되는 일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을 극복하도록 도와야만 합니다. 그러한 장애물 중 일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시스템 안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일과 “영혼을 구하는 일”은 병행 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일부 사람들은 예배와 사회 정의를 대조적으로 봅니다. 교회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한편에서는 말합니다. 하지만 다른 편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재판정과 거리에서 하는 일들은 교회의 거룩한 모임에서 하는 일들보다 하나님께 더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사야의 말은 우리가 그것을 성경에서 떼어내어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유일한 말씀으로 삼는다면 후자의 견해와 일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들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들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자녀들을 돌보는 일을 포함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라고 요한일서 4:20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예배는 반드시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은 또한 예배로 이어져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정의로운 일은 우리 힘만으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석 절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16a절은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배에 대한 그의 단호한 정죄와 정의롭게 살라는 그의 강한 부르심을 하나님의 지성소 안으로의 부르심으로 끝내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이 말씀은 법적인 언어입니다. 너는 너의 경우를 주장하고 나는 내 주장을 주장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내 고소 거리를 가져올 테니 너는 네 자신을 변호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누가 소송에서 이길지 압니다. 그래서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들이 너무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신은 할 수 없는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겠다고 제안하십니다.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15절의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어떻게 그렇게 될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정결케 하시겠다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새 어린양과 새 희생에 대한 선포는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이사야의 예언에서는 제사보다 긍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그 분의 자비로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9-20절 전체는 진정한 회개의 필요성과 본질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두 개의 “만약”이 크게 다가옵니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라는 말씀과 “칼에 삼켜지리라”는 말씀의 차이는 “만약”이라는 작은 단어에 달려있습니다. 먹을 수도 있고 삼켜질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같은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와 넓은 긍휼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회개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는 단지 잘못했다는 말만 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의지와 눈에 보이는 행동의 변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의지 대 저항, 순종 대 반항의 대결입니다. 우리가 한 회개라는 행동 때문에 정결함을 획득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회개와 긍정적인 쌍둥이인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은혜와 자비를 받는 것입니다. 죄에서 돌이키지도 않고 하나님께 대하여 마음을 열지도 않는다면 구원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예화 아이디어
제 생각에는, 믿음을 “영혼의 열린 입”이라고 불렀던 사람은 John Calvin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구원으로 우리를 채우고자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의 머리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입이 닫히면 그 구원을 마실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와 광대한 긍휼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야만(회개) 하고 우리의 영혼을 열어야만(믿음) 합니다. 제 어린 자녀들이 맛있는 음식이 가득한 숟가락이 다가올 때 여전히 머리를 돌리고 먹기를 거부하는 모습을 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완고한 아이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자, 와서 함께 생각해 보자. 이 일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네 머리를 사용해 봐.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자. 나는 네게 주고 싶은 놀라운 것을 갖고 있어. 그러나 네가 네 머리를 돌리고 네 입을 꽉 다물고 있는 한 너는 그것을 한 조각도 먹을 수 없어. 이해가 되지? 그렇지?
이사야 1:1, 10-20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