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지난 번 사도행전 5장에 대한 글에서 말씀 드렸듯이, 렉셔너리(Lectionary)는 통상 구약 본문을 첫번째 본문으로 삼지만, 부활절 기간에는 부활이 초대 교회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기 위하여 사도행전을 첫 번째 본문으로 삼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성장을 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이사야 65장)을 어떻게 창조하시는지 보여주는 것은 탁월한 방식입니다.
그러한 교회의 성장은 항상 편안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에 대한 첫 번째 박해가 진행 된 후에 발생한 새로운 개종자들의 폭증은 추한 인종적 편향을 가진 목회적 문제를 초래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일곱 집사를 임명함으로써 “과부 구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 일곱 집사의 임명은 구제를 공평하게 분배하는 일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고, 사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을 위해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후에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복음 전파를 멈추라는 명령들이 돌이 되어, 일곱 집사 중 한 명인, 성령으로 충만했던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교회를 향한 광범위한 박해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 박해는 많은 기독교인들을 예루살렘을 떠나 원거리에 있는 그들의 고향으로 내좇았습니다. 흩어진 사람들 중에 일곱 집사 중 또 한 사람인 빌립이 있었습니다. 아직 유대 지역에 머물고 있을 때 그는 첫 번째 아프리카 회심자를 만드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웃한 사마리아에까지 복음을 전했고, 이와같이 지상에서 믿음의 영역을 넓히라는 예수님의 대위임령은 성취되고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놀라운 소식들이었지만, 오늘 본문은 믿음이 땅 끝까지 전하여지고 있는 만큼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박해 역시 널리 퍼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스데반이 죽어 가던 현장에 있던 조연들 중 한 사람이 가장 악독한 악당 역을 맡게 됩니다. 귀한 가문 출신인 헬라파 유대인이며, 높은 학력을 가지고 있으며, 믿음에 있어서 열심이었던 다소의 사울은, 교회를 예루살렘 밖으로 내쫓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채, 이 새로운 “도”를 지구상에서 말살하려고 결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도를 땅끝까지 전하시기 위해서 바로 이런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이 너무나 전형적이며 아이러니 합니다.
산헤드린으로부터 공문을 받은 사울은, 사도들과 연관된 사람들이라면 어떤 사람이라도 찾아 체포하고, 예루살렘으로 다시 끌어 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부터 북동쪽 150 마일에 있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다음 일어난 사건은 모든 문학 작품들에 있어서 가장 놀라운 반전 이야기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사실, “다메섹 도상 경험”이라는 문구는 성경에 대한 지식이 전해지는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극적인 삶의 변화를 표현하는 문화적 슬로건이 되어 왔습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울이 있던 곳이 바로 다메섹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세 번 등장합니다. 세부 사항들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오늘 본문의 나레이터인 누가에 의해서 한 번, 그리고 사울/바울 자신에 의해서 22장과 26장에 두 번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 내용은 세 본문에서 동일합니다. 하늘로부터 비춰진 아주 밝은 빛 때문에 사울은 땅에 쓰러졌습니다. 하늘로부터 들려 온 한 목소리가, 사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질문을 던지며 사울을 강타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바울은 두려운 나머지 말을 더듬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그 주님은 사울이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던 놀라운 대답을 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그 한 마디만으로도 불신자였던 사울을 변화시기키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박해자에서 복음 전도자로 변화시키기 위해 이런 말씀을 더하셨습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설교에서 이 사건의 다양한 면모들을 다룰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현현의 모습인 밝은 빛과, 천둥 소리같은 목소리를 다룰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박해 받는 교회와 동일시 한 부분이며, 사울이 알지도 못하는 목소리에 “주여”라고 반응한 부분, 혹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때 사울의 마음의 상태 등을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요소들은 설교에 다채로움을 더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오늘 Lectionary 본문이 끝나는 부분에서 설교를 멈추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주제를 놓치는 실수를 범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 이야기의 주제는 단지 우선적으로 사울의 회심이 아닙니다. 그 주제는 궁극적으로 바울이 복음을 전하라는 위임을 받았다는 데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가 회심하지 않았더라면 위임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회심은 단순히 천국에 들어가는 티켓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는 그에게 주어진 사명의 시작이었습니다.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의 힌트는 6절에 등장하는 “행할 것”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일어난 변화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급진적인 정통 교리의 챔피언이 이제는 남의 손에 이끌리어 앞으로 삼 일 동안 밤이고 낮이고 금식하며 기도할 어떤 집으로 가야 하는 눈 멀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 아이가 된 것입니다.
사울은 예수님과의 충격적인 만남 후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아나니아를 보내셔서 그의 사명을 설명해 주셨고, 아나니아를 통해 신앙의 내용을 소개 받았고 믿음의 공동체도 소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해가 되는 부분이지만, 아나니아는 사울을 만나기를 꺼려했습니다. 이 사람 사울에게는, 이렇게 홀로 있는 그리스도인인 아나니아에게 무슨 행동을 할 지 이미 알려진 그럴만한 평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나니아를 재촉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사울을 향한 마음에 품은 특별한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예수님의 그릇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가서, 사울의 삶의 행로를 뒤바꿔 놓은 하나님의 일을 마무리 합니다. 아나니아가 어떻게 즉각적으로 사울을 새로운 교회 생활 안으로 이끌었는지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안수 한 후 그를 “형제 사울”이라 부릅니다. 그는 복음의 핵심을 명확하게 말해줍니다. 그 복음의 핵심은 사울이 길에서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의 멀었던 눈을 고쳐 주고, 사울이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도록 인간적 통로가 되어 줍니다. 그 후에 사울은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습니다(아마도 성찬 아닐까요?).
이와 같이 기운을 차린 사울은 나머지 다메섹 교회 교우들에게 소개 됩니다. 그 후 즉시 그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약속된 그리스도라고 회당에서 전도하기 시작합니다. 그 때가 바로 사울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사명이 성취 되기 시작할 때입니다.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리라.” 유대인들은 사울이 완전히 변화한 것에 놀란 나머지 그를 죽일 계획을 짜기에 이릅니다. 반전이 완결 된 것입니다. 스데반이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며 죽어 갈 때 옆에 서 있던 그가 이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 때문에 살해 위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잠재적 살인자가 이제 잠재적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그 이름 전함을 막아 섰던 그가 이제 그 이름을 땅 끝까지 지고 갈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사람을 그토록 철저히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놀라운 이야기를 설교할 때의 강조점입니다.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고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신약 성경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나타나신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오늘 본문이 말하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적어도 바울이 고전15:8에서 말하고 있는 바를 따른다면 말입니다). 초대 교회의 성공과 존재 이유는 (현대 교회도 마찬가지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에 있습니다. 인간적인 논쟁을 통해서는 사울은 절대로 변화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상을 위해 죽을만큼 그렇게 용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를 움직여 나갔던 것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실체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와 나” 그 이상이지만, 그렇다고 그 이하도 아닙니다. “나는 예수다.” 교회가 살고 성장하는 것은 이 두 마디 말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전해야 할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님입니다. 사울의 초기 복음 선포에 대한 누가의 요약은 그 후 계속 이어지는 복음 전파의 기준이 됩니다. 사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했습니다. 이 선포가 바로 예수님께서 마16:18에서 그 분의 교회를 그 위에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 반석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 분이야말로 메시아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했습니다. 기독교적이기 위해서는 설교는 늘 그렇듯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각각의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그리스도에 대해 각 본문에 녹아 있는 독특한 면을 전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사도행전 9장을 설교한다면 세 가지 요소들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첫째, 아무도 예수님의 구원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울과 같은 사람이 바울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면, 누구에게나 희망이 있습니다. 바울이 나중에 기록한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죄로 죽어 있고, 죄의 능력에 사로잡혀 있으며, 세상과 육신과 마귀라는 불경한 삼위일체의 노예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사람들조차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둘째, 늘 회심 뒤에는 위임이 있습니다. 사울을 단순히 한 명의 그리스도인 만드시려고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울로 하여금 특별한 일에 사용되도록 사울을 그리스도인으로 변화 시키셨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오래 된 요리문답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 받았고, 섬기기 위해 구원 받았다.” 바울의 동료 선교사인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전에 우리는 백성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하나님께 속한 택한 백성들이 되었는데, 이는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우리가]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10).”
셋째, 사울 곁에 아나니아를 비롯한 믿음의 공동체가 없었더라면, 사울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찰스 캠벨(Charles Campbell)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명은 단순히 ‘나와 예수님’ 사이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믿음의 공동체에 의해 판단되고 확인되고 방향이 정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금식을 하거나 기도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사색을 하기 위한 자기만의 골방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의 지지나 격려 없이는 세상에 나가서 제자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사울로 하여금 그의 나머지 삶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직접적으로 사울에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평범한 한 신자인 아나니아를 택하셔서 그를 통해 말씀하시고 일을 하셨습니다. 교회는 문자적으로 지상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는 교회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이 극적인 이야기를 찰스 캠벨(Charles Campbell)이 요약한 방식을 좋아합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느슨’하십니다. 그 분은 세상에서 행할 우리의 사역을 위해 때때로 놀라운 방식으로 사람들을 만나시기도 하시고,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시기도 하십니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 앞에서는 박해자들도 박해 받는 사람의 고난을 공유하는 동맹이 됩니다. ‘평범한’ 신자들이 분별의 은사를 제공합니다. 원수들은 형제와 자매가 됩니다. 폭력은 증언으로 대체 됩니다. 위임식과 세례와 성만찬은 성령의 변화시키시고 능력 주시는 사역을 위한 매개체가 됩니다. 말씀은 살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달 됩니다.”
예화 아이디어
유턴을 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Fast and Furious” 영화에 등장하는 도로를 질주하는 폭주족들처럼 복잡한 도로 한 복판에서 타이어에 연기를 일으키며 빠른 속도로 도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니면 컨트리송 가수가 “나에게 40 에이커의 땅을 주시면 이 트럭을 돌리겠습니다”라는 아주 오래된 노래에서 말하는 방식으로 돌릴 수도 있습니다. 사울의 경우에는 그를 박해자에서 복음 전도자로 180도 극적으로 변화시킨 빠르고 급격한 변화였습니다. 디모데의 경우는 점진적으로 변화한 경우입니다. 어려서부터 그는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딤후 3:15)” 했습니다. 둘 다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있었던 서부의 산불과 남부의 홍수들로 인해 수 많은 구조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가슴 아픈 일은, 종종 그런 구조 작업들이 생존자 하나 없이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사도행전 오늘 본문에서는 둘 다 입니다. 예수님은 구조 작업을 나가셨습니다. 사울은 죄로 죽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자에게도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사울에게 새 생명을 주셨고, 그로 하여금 한 평생 구조 작업을 하도록 그를 보내셨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저자: Stan M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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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9:1-6, (7-20)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