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에 대한 말씀을 담고 있는 잠언 본문보다 삼위일체 주일에 더 적합한 본문들이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6:12~15이나 로마서 5:1~5이 바로 그런 본문들입니다. 적어도 그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 언급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삼위일체라는 용어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지만, 잠언 8장의 주석들을 인용하여 이 본문을 기꺼이 삼위일체 주일에 사용하고 싶다면, 이 본문을 통해 삼위일체론의 경계선 근처에는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직역하여 읽는다면 지혜에 초점을 맞출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 본문은 앞에 나오는 잠언 7장을 이 성경의 절정에 이르게 하는 지혜 문학의 결정적인 한 조각입니다.
잠언 8장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을 둘로 본다면,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1절~21절은 지혜와 인간에 관한 내용이고, 22절~31절은 지혜와 하나님에 관한 내용입니다.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첫 번째 부분은 지혜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지혜의 부름(1절~11절)과 지혜가 그토록 중요한 모든 실제적인 이유(12절~21절), 이렇게 다시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22절~31절에서 하나님과 지혜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이 세상을 지혜로 살아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를 말해줍니다.
지혜가 의인화 되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지혜가 마치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외치고, 목소리를 높이며, 자신의 입장을 취합니다.” 이것은 지혜를 개념이나 원리가 아니라 실존 인물처럼, 마치 잠언 7장에 나오는 관능적인 속삭임으로, 그러나 치명적인 거짓말로 유혹하는 음녀처럼 취급하는 것입니다. 예전 신학자들을 따른다면, 우리는 여기에 실제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이거나, 신약에서 하나님의 지혜로 언급되는 두 번째의 위격일 가능성이 더 큰 그런 존재 말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혜의 위격을 어떻게 이해하든, 오늘 본문의 첫 번째 부분에서 지혜가 모든 사람을 부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잠언 7장에 나오는 수줍은 여인이 몸을 비틀며 속삭이는 것과 달리 지혜는 우뚝 서서 큰 소리로 말합니다. 그 부름에는 다급함이 있습니다. 12절~21절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성공적인 삶은 지혜의 추구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장의 결론은 그 이상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찾는 자는 생명을 얻고 주께 은총을 받는 자다. 그러나 나를 찾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해친다. 나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죽음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정말 드라마틱합니다. 이러한 삶과 죽음의 언어는 우리로 하여금 지혜가 궁극적인 것, 즉 철학자와 신학자들의 관심 영역인 형이상학적 문제를 다룬다는 결론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작 구절들은 지혜를 분주한 시장과 법정, 대중이 만나는 교차로와 인간 상호 작용을 조망할 수 있는 곳에 두고 있습니다. 지혜는 교실이나 수도원이 아니라 서민들이 살고 있는 바쁜 곳에서 생겨나서, 모든 사람에게 “나는 당신이 삶의 현장을 변화시킵니다!”라고 외칩니다.
여러분이 이 부분을 전체 설교에 할애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이 가지고 있는 이 시대의 모든 어리석음을 감안할 때, 지혜로운 삶의 가치와 이점을 설명하는 것이 크게 도움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Lectionary는 다른 방향성을 제시합니다. 22절~31절에서 시적으로 묘사된 지혜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신비로운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러한 관찰을 통해 실제적인 유익을 얻는데 도움을 줄 수 없다면, 여러분의 설교는 설교학적으로 볼 때 그다지 성과 없는 쪽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오늘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는 나의 요약이 이 마지막 구절을 공부하는 것의 가치에 대해 당신과 성도들에게 확신을 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혜가 말하기를 “현명하게 살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심지어 하나님에게도 지혜가 필요하셨다.”라고..
이 마지막 구절들에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서 지혜는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이 가정하는 것처럼 의인화된 하나님의 속성일 뿐입니까? 아니면 예전 주석가들이 가정한 바와 같이 신성한 인격체입니까? 전자의 문제점은 지혜가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태어났다”는 것입니다(24절과 25절).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 곧 영원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한 요한의 생각과 일치합니다. 후자의 문제점은 지혜를 여호와의 첫 번째 사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자가, 하나님과 같지만 하나님은 아닌 하나님의 첫 번째 창조물이라고 한 아리우스적 개념처럼 들립니다. 나는 이 단어들에 대한 후대의 신학적 논쟁을 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텍스트에 대한 고려 속에서 어떻게 이런 신학적 논쟁들이 나오게 되었는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이 설교를 통해 이러한 논쟁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지혜가 창조보다 앞서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존재하기 전, 모든 것이 “형체가 없이 공허”할 때, 지혜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제자리에 두시며 ..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 지혜가 거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에 자신의 지혜를 사용하셨습니다. 지혜는 하나님이 천지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 편에 있던 “장인”이었습니다. ‘장인’이라는 단어는 번역하기 어렵지만, 저는 우주를 설계한 건축가로서의 하나님(성부?)의 이미지와 그것을 실제로 조합한 건축가로서의 지혜(성자?)의 이미지가 마음에 듭니다. 이것은 확실히 요한복음 1:3, 골로새서 1:16, 히브리서 1:2의 언어와도 일치합니다.
지혜는 단지 도구적인 요소가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였습니다. 지혜는 세상을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 직조되어 있었습니다. 지혜를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혜는 실재이며, 하나님이 만물을 만드신 방식입니다. 우주의 중심에는 우연이 아니라, 지혜가 있습니다. 창조 속에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지혜는 삶을 움직이게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잠언은 지혜의 뿌리를 인간의 관찰과 추론이 아니라 하나님과 지혜와 세상의 관계에 두고 있습니다. 삶은 하나님이 현실의 구조 속에 만들어 놓으신 방향으로 움직일 때 가장 잘 작동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혜롭게 살지 않으면, 아무 열매 없이 파멸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이 이러한 은유로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하나의 나무 조각이 아닌 놀고 있는 어린 아이의 은유를 좋아합니다. Hubbard는 이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즐거운 아이처럼 지혜는 창조물의 위엄과 힘에 흥분하여, 지혜의 즐거움을 절묘하게 기뻐하시는 창조주와 함께 매일 농담을 주고 받으며 이에 대해 웃고 있습니다.” 다소 과장된 표현일 수 있지만, 본문에서는 지혜가 “날마다 기쁨이 충만하며, 그의 (하나님) 임재를 기뻐하고, 온 세상과 사람들을 기뻐”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세상, 특히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동기에 대한 훌륭한 설명이 있습니다. 환희, 기쁨, 단순한 존재에 대한 깊은 환희와 그 존재 안에 있는 기쁨을 나누고자 하는 열망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창조를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입니다.
안타깝게도 상황이 그렇게 되어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너는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궁극적인 어리석음을 선택했을 때 하나님은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기쁨은 다양한 형태의 죽음으로 대체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기쁨을 잃어 버리는 것에 대해 슬퍼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슬픔을 초월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어리석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30). 잠언 8장의 지혜가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되고,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참고; 골로새서 2:2,3).
예화 아이디어
기름이 없는 엔진처럼 지혜 없는 인생은 제대로 작동되지 않습니다. 물 속에 잠긴 휴대폰처럼 어리석음의 영향력 아래 있는 인생은 제대로 작동되지 않습니다.
잠언 8:1-4, 22-31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