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일 서신서 본문은 William Faulkner라는 소설가가 남북전쟁 이후 미국 남부에 대해 한탄했던 “과거는 결코 죽지 않는다. 과거는 결코 과거가 아니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은 어떤 면에서, 역사가이며 철학자인 George Santayana의 “역사를 배우지 않는 자는 반드시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는 말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1:10-18을 이번 달 The Christian Century나 Christianity Today에서 빌려 왔다고 추측하거나, 심지어 그가 이번 주일 서신서 본문을 오늘 자 CNN이나 Fox News의 제목에서 그대로 가져왔다고 의심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터무니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역사적으로 교회가 고린도전서 1:10-18의 탄식을 유발하는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반복해왔다는 사실입니다. Vancouver, British Columbia에서 Miami, Florida에 이르기까지, 21세기 북미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은 1세기 고린도 지역에서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분열이 오늘날 북미 지역에서도 유사하게 반복되고 있음을 애도합니다.
Faulkner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교회의 분열의 과거는 슬프게도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과거는 아직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교회사 수업이나 George Santayana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지 못한 듯 합니다. 우리는 교회 분열의 역사를 거의 매일 반복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0에서 바울은 고린도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십자가의 길을 따르라고 간청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서로 동의”(to auto legete pantes)하여 우리 사이에 “분쟁이 없”고(me e en hymin schismata)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연합하라고(katertismenmoi en to auto noi kai en te aute gnome) 권면합니다.
그의 간청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실천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권면은 이번 주일 서신서 본문만 아니라, 바울이 고린도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그의 첫 번째 편지 전체의 핵심 내용입니다. 따라서 설교자들은 이 권면을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투자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어 성경이 종종 “서로 동의하라”라고 번역하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모두 같은 말을 하라”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주장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신학의 여러 주변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지만, 그들의 메시지에 있어서는 통일을 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는 F. W. Grosheide라는 성경학자가 고린도전서 주석(Commentary on the First Letter to the Corinthians, Eerdmans, 1953)에서 제안한 것처럼,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같은 말을 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믿음을 일치시키신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헬라어 접속사 hina(그러므로)가 하나님의 자녀 된 이들이 같은 것을 말하는 것과 그들이 하나가 되는 것 사이에 강력한 연관성이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Schismata(분열)의 문자적인 의미는 “균열”입니다. Grosheide는 이 단어가 단순한 의견 차이를 의미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장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 맥락은 그보다는 훨씬 더 어둡고 불길한 어떤 것을 암시합니다. 사도 바울이 11절에서 언급한 “분열”은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장벽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사랑하신 고린도 지역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분열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되새기며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katertismenmoi en to auto noi kai en te aute gnome)고 권고합니다. 핵심 단어인 “katertismenmoi”라는 말 안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중간태 또는 수동태인데, 이는, 사도 바울에 따르면, 고린도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들을 하나로 만들어 가신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더 나아가, “katertismenmoi”의 분사 형태는 성령께서 고린도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을 하나 되게 하시는 사역이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임을 암시합니다.
이번 주일 서신서 본문 설교의 핵심 쟁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시는 사역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바울은 주장은 성령께서 고린도 교인들의 noi(마음)와 gnome(목적)을 완벽하게 하나로 묶기 위해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과 이 서신 전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고린도 지역 그리스도인들은 이 연합을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설교자들은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서, 설교자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이 이해하기를 바랐던 “마음”과 “생각”의 완전한 연합이 무엇인지를 탐구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지역 교회 안에 문자적인 의미의 “일치”가 실현되기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결국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같은(auto) 것을 말하라. 그래야 너희 사이에 분열이 없으며, 그로 인해 같은(auto) 마음과 같은(aute)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완전한 연합은 정확히 무엇입니까? Dwight Peterson이라는 신약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연합은 … 획일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교회는 지도자들에 대한 문제들 때문에 분열되어서는 안 되며, … 대신, 복음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굳건히 붙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나 자신이 섬기고 있는 교단을 포함한) 많은 교단들과 심지어 교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라는 복음에 집중하기보다 마음과 생각의 일치를 더 편협하게 정의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21세기 교회는 특히 인간 성에 관한 문제에 대한 마음과 생각의 완전한 일치를 점점 더 중요하게 여기는 듯 합니다. 게다가, 교단들과 회중들이 정치적인 입장이나 기후 문제나 인종 관계에 대한 견해에 따라 계속해서 분열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분열에 대해 느끼는 놀라움의 정도 또한 놀랍습니다. 개신교와 정교회는 가톨릭 교회와의 분열에서 비롯된 산물입니다. 더 나아가, 나 자신이 속한 교단을 포함한 많은 교단들과 교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 개인과 가족이 때로 거의 연쇄적으로 “교회를 옮겨 다니는” 모습까지 더해지면, 우리가 마치 들끓는 분열의 도가니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설교자들은 자신의 신앙의 전통의 맥락에서, 또 교단과 지역 교회의 맥락에서 그러한 분열에 대해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교회에서 갈라져 나간 타인이나 다른 가족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분명하게 말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단지 ‘교회’가 아니라, 우리의 지역 교회들을 계속해서 괴롭히고 있는 분열과 관련해서 우리가 기여한 부분이 없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번 주일 서신서 본문의 설교자들이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은, 우리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열에 대한 절망이 커져가는 상황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 지역 그리스도인들에게 촉구한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생각의 일치라는 소망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포는 사도 바울이 집중한 기독교의 본질에 우리의 설교를 끊임없이 집중하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물론 자신이 편지를 보낸 고린도 교회를 분열시키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지면을 할애했지만, 그는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세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도 심도있게 논합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권하는 연합을 촉진하기 원하는 설교자는 결과적으로 그러한 본질적인 것에도 의도적으로 집중해야 합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세례에 대한 이해가 때로 교회를 가장 심각하게 분열시키는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세례 예식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세례를 통해 옛 사람이 죽고 신실한 순종을 위한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에 설교의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제자들 간에 일치를 원하는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이 섬기는 교회로 하여금 신앙에 대해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협력할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격려할 수 있습니다. 주일예배와 수요예배를 함께 드릴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자녀 된 이들이 공동의 선을 위해, 특히 물질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함께 일할 수는 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바울이 본문 10절에서 언급한 생각과 마음의 일치에 대한 잠재적인 의미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적으로 궁핍한 이웃에 대해 생각과 마음으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그들을 이민자나 불법 체류자나 복지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웃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을 흑인이나 황인 또는 백인, 공화당원이나 민주당원, 혹은 LGBTQ나 이성애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하나님께서 깊이 사랑하사 하나님의 평안인 샬롬을 누리기를 원하시는 사람들로 생각합니다.
예화
우리 교회의 급식 사역은 굶주린 이웃들에 대한 하나 된 생각과 마음을 계속해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우리는 매달 두 차례 600~700명의 이웃들에게 음식을 제공합니다. 다양한 교회들과 교단들에 속한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에 대한 하나 된 생각과 마음을 가지지 못했다면 이 일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한 가톨릭 교회는 격주로 우리 교회의 급식 사역을 위한 모금 행사를 합니다. 이 사역의 자원봉사자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교단과 교회에서 옵니다. 그 중에는 경건한 유대들도 있습니다 – 물론 이 주제에 대해서는 다른 차원의 논의와 성찰이 합니다. 자원봉사자들은 단순히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 대한 통일된 관점만 아니라, 이웃들과 함께하고 그들을 섬기는 이 사역의 연합된 성격 때문에 이 사역에 끌린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10-18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