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2:12-31a 주석

발칸화는 일반적으로 국가, 지역, 심지어 사회가 여러 개의 경쟁하는 파벌로 분열되는 것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21세기 교회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도 발칸화(분열)가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합니다.

스스로를 ‘복음주의자’ 또는 ‘진보주의자’라고 칭하는 북미 기독교인들은 종종 노골적인 경멸까지는 아니더라도 의심의 눈초리로 서로를 바라봅니다. 미국 공화당이나 민주당에 소속된 기독교인들은 서로 최소한 거리를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독교의 분열은 바울이 이번 주일 서신서 공과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의 한 증상입니다. 바울은 12장에서 통일성과 다양성 사이를 오가는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1-11절에서 사도는 성령의 임재와 관련하여 이 두 가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12-31a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와 관련하여 다양성뿐만 아니라 통일성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이번 주일 서신서 공과에서 사도가 사용하는 많은 내용은 인체 해부학과 관련이 있습니다. “몸은 많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하나의 단위입니다”라고 그는 12절에서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부분은 많지만, 그들은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14-27절에서 이 주제를 이어가며 발, 눈, 귀를 포함한 인체 부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는 13절과 27-31a절에서 그리스도의 몸 해부학 교훈을 주면서 인체 해부학 교훈을 잠시 멈춥니다. 이번 주일 서신서 공과의 선포자들이 집중하고자 하는 바로 그 교훈입니다.

무엇보다도 바울은 그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을 우리의 세례에서 찾습니다. 그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을 하나되게 하신다고 주장합니다. 이 감동적인 확신을 선포하는 사람들은 12절에서 “모두”와 “하나”와 같은 단어가 여러 번 사용된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13절에서 “우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물론 사람들의 인종, 성별, 나이, 성 및 정치적 성향, 사회경제적 지위는 모두 다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바울이 “헬라인과 유대인, 노예와 자유인”에 대해 언급한 것은 고린도 시대 사람들도 이러한 차이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특히 21세기 북미인, 그리고 그 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우리의 정체성을 이러한 특성 중 하나 또는 그 이상과 점점 더 연관시키는 것같아 보이지만, 바울은 우리의 정체성의 중심을 세례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캐나다인, 미국인 또는 다른 국적의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입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개혁파나 성공회, 로마 가톨릭이나 정교회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세례 받은 기독교인입니다.

이 연합은 이번 주일 서신서 공과에서 빛을 발합니다. “모든”은 바울이 주장하기를, 세례받은 이들입니다. 성자들과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의 몸”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이나 주류 그리스도인들 뿐만 아니라 보수적 또는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의 몸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물론 세례라는 이 연합의 힘이 또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가장 큰 분열의 씨앗이 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더욱 슬픈 일입니다. 유아 그리스도인들이 세례를 받아야 하느냐 아니면 그들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려야 하느냐로 분열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오직 한 번 세례를 받을 수 있는지, 아니면 두 번째 세례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해 이상적인지 여부를 놓고 논쟁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해석 문제는 더 깊은 문제로 이어집니다: 바울은 13절에서 어떤 종류의 세례를 언급한 것일까요? 물 세례 또는 성령 세례? 아니면 바울이 적어도 세례의 포인트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세례일까요?

롬6:3-4에서 바울은 기본적으로 세례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고… 그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세례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의 본성적인 죄성을 죽이고 그리스도를 닮은 순종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행하시는 외적 표징입니다.

물론 우리의 세례 신학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나이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고린도전서 12장의 선포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세례 신학의 차이점들을 강조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우리 청중들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어떤 면에서 기독교인들이 서로 분리되어 사는 것을 선호하는 또 다른 “저장고”를 세우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12:13의 신비는 “세례”에 대한 언급의 의미로 끝나지 않습니다. 또한 분열을 야기할 수 있는 어떤 잠재력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NIV 성경은 바울이 계속해서 “한 성령으로” 모두 다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하지만 본문 주석은 “en”을 “함께” 또는 “안에”로 해석할 수 있다고 제시합니다. 저는 이번 주 서신서 공과 선포자들이 “en”의 의미를 더 깊이 탐구할 수 있는 기술이나 적절한 배경이 없다면 세례에서 중대한 역할을 감당하시는 “하나의” 성령에 초점을 맞출 것을 제안합니다.

성령 사역에 대한 강조는 이번 주 서신서 공과 선포와 1-11절의 성령에 대한 반복적 언급을 연결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성령”(프뉴마) 이라는 단어를 10번 이상 사용합니다(그리고 11절에서 성령을 지칭하는 남성 대명사도 추가합니다!)

따라서 스테판 패리스는 “성령의 나타나심”(7절)이 단지 지혜의 메시지(8절), 믿음(9절) 그리고 능력 행함(10절)만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교회 연합을 위한 부드러운 돌봄”도 포함됩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방언 말함”(10절)의 은사를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같은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과 함께 살아가십니다.

사도는 계속해서 “우리 모두 다 한 몸으로 한 성령에 의해 세례를 받았습니다”라면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시는 사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몸은 그 신학자(스테판 패리스)가 13절의 “동심원의 고리 안에 있는 가장 안쪽 고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의 “바깥 고리”는 성령에 대한 처음과 마지막 언급입니다. 다음 고리에는 세례식에 대한 사도의 언급과 보이스가 말한 “성체를 마시는 것”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가장 안쪽 고리”는 “성령과 연합 성례에 의해 창조되고 유지되는 ‘한 몸’입니다”라고 그 신학자는 계속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께서는 우리를 개혁교회, 성공회, 루터교회 또는 매노나이트 교회로 먼저 세례주신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사도신경에서 “거룩한 공회”라 부르는 그리스도의 몸인 “한 몸”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제 동료인 스탠 매스트는 이 부분은 하나님의 교회를 창조하고 세우고 더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바울의 강조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예배하고 은사와 재능을 사용하기 위해 지역 교회를 선택합니다. 또한 때로는 한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에 등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역으로 인해 전 세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한 일부임을 상기시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은혜롭게도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 후 성령은 그런 우리를 교회로 연합시키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인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라고 매스트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맴버십을 이전할 다른 교회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롭게도 입양된 아들과 딸을 두셨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존재하고 있으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 계속해서 존재할 것입니다. 매스트는 계속해서 “우리가 교회를 할 때 우리만의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우 거룩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너무도 많은 것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나누고 있지만 이번 주 서신서 공과는 우리가 받은 세례가 우리를 하나되게 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너무도 많은 것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서로 분리시키고 있지만 성령은 우리를 하나되게 하시려고 사역하고 계십니다. 때때로 많은 일들이 예수의 사람들의 정체성을 빼앗아 가지만 이번 주 서신서 공과는 그리스도의 한 몸에 속한 우리의 맴버십이 지금 그리고 영원히 정말 중요한 하나의 정체성을 우리에게 준다고 강조합니다.

예화

저는 세 명의 손자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엄청난 특권을 누렸습니다. *야곱과 요셉에게 준 세례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지만 예상 가능한 일이었기에 대부분 잊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손자들의 협조가 거의 완벽했기에 세례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손녀인 *사라의 세례는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잊을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성찬식 내내 비명을 질렀습니다. 나중에 그 아이의 엄마는 그 5-7분이 “내 생애 가장 스트레스가 심했던 두 시간”이라며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세례에 대한 사라의 기대와 반응이 세례 생활에 대한 일종의 비유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종종 해왔습니다. 우리는 보통 세례를 예쁜 드레스, 멋진 옷차림, 감사한 덕담으로 가득한 행복한 날의 일부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세례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으로 기억한다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우리도 사라가 했던 방식처럼 적어도 발로 차고 비명을 지르지 않았을까요?

*그들의 실제 이름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