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사전에 “~을 위해 목숨을 바치다”( “to die for”)보다 이상한 숙어가 있습니까? 결국, 우리가 무언가를 “~을 위해 목숨을 바치다”라고 주장할 때 우리는 그 무언가를 죽음 자체만큼 비극적인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인종적 불의나 전 세계적 유행병을 “~을 위해 목숨을 바칠 만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때때로 그것은 죽음을 초래하지만요.
우리가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다”라고 말할 때는 그것이 특히 아름답거나 훌륭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날씨, 멋진 드레스 또는 감미로운 음식과 같은 것들에만 “목숨을 바칠 만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목숨을 바친” 대상이 비극적이고 흠이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라고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드물고 선인을 위하여 감히 죽는 자가 혹 있느니라.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바울의 영감받은 펜에서 말이 흘러나오면서 우리는 바울의 생각이 서로 교차하는 것을 거의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주장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가 잠시 멈춰 서서 “내가 방금 뭐라고 말했지?”라고 말하는 것을 거의 상상할 수 있습니다.
결국,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위해 세상에서 누가 죽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사람을 위해서라도 목숨을 바칠 수 없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은 뛰어난 사람을 위해 기꺼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바울이 “나는 그것을 의심합니다!”라고 덧붙이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일 서신서 교훈의 설교자와 청중은 가족이나 가장 친한 친구와 같이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바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살 날이 있다고 생각하는 저로서는 가령 다른 누군가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은 슬프지만 병역의 일상적인 부분입니다.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은 미 해군 특수부대원 마이클 몬수어(Michael Monsoor)에게 이라크전 영웅적 업적을 기려 명예훈장을 수여했습니다. 그와 함께 6명의 다른 군인이 배치된 건물 옥상에 저항세력이 수류탄을 던지자 몬수어는 즉시 수류탄 위에 엎드렸습니다. 그는 이로 인해 치명상을 입었지만 동료들을 구했습니다.
마이클 몬수어와 같은 영웅을 위한 기념식에는 때때로 요한복음 15:13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그러나 이 주석에 대해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도와준 플레밍 러틀리지(Fleming Rutledge)가 지적하듯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훨씬 더 급진적입니다.
더군다나 바울 사도는 친구, 가족 또는 국가를 위해 죽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오, 그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단번에 이해를 못한 경우를 대비하여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덧붙입니다.
성령님께서 청중에게 로마서 5장의 진리를 열게 하기 위해 설교자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가장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상상해 보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다. 일부는 잔인한 경찰이나 탐욕스러운 약탈자를 떠올릴 것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청중에게 그들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을 보내거나 보내는 것을 상상해 보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상상하기도 어려운데,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은 놀라운 일을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전히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존귀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평판이 좋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면 그분의 죽음을 요구하진 않았더라도 당연히 묵인했을 것입니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지극히 사랑하는 백성인 우리 자신을 “경건치 아니하다”고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령님은 우리를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닮도록 변화시키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의 선포자와 청중은 이 본문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셨을 때의 우리 자신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는 아마도 우리가 가장 이기적인 순간에 우리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짐 반 쏠른(Jim Van Tholen)은 31세의 네덜란드 개혁파(Christian Reformed) 목사였습니다. 그는 암으로 죽어가면서, 제가 지금껏 읽은 가장 강력한 설교 중 하나를 썼습니다. 그 글에서 그는 죽음의 예고가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다고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악취나는 죄를 쌓으면서 30년이 이상 살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 모든 나쁜 행동을 만회할 시간이 40년 이상 남아있다고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감동적인 설교를 하면서 그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간이 몇년이 아니라 몇달 밖에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본문의 6절에 있는 “아직”이라는 짧은 단어를 가리키며 반 쏠른을 위로하셨습니다. 사실, 영어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지만, 바울은 실제로 그 단어를 두번 사용하면서 강하게 주장합니다. “아직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양자들을 성령으로 준비시키셨지만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만큼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지만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보답을 비교적 적게 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무죄를 향해 진보하고 있다고 상상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진정한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계속 언약을 어겼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미완성의 사절단(ambassador)이었습니다. 죄는 신약의 초기 교회들에게도 상처를 남겼습니다. 매주 주일에는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 시간에 따로 시간을 내어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고 고백합니다.
최근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우리가 인종차별과 인종적 부당함을 퇴치하는 데 있어 충분한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세계적인 유행병은 우리가 여전히 전염병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것은 우리는 우리가 될 수 있는 전부가 아니라는 것과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우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살아있는 한 우리는 누가복음 18장의 세리와 함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하거나 교회와 함께 “그리스도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바로 이 순간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면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처음 우리가 고백한 것처럼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러틀리지가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구원하신 사람들 외에는 스스로를 죄인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구속하지 않으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생각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바울이 말하는 우리의 “무력함”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누군가가 우리를 희생시키지 않는 한 우리는 스스로를 돌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력하다고 확신을 합니다. 게다가 우리 문화는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우리를 설득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실제로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와 정반대로 가르칩니다. 성경은 그의 입양된 형제자매들이 스스로를 도울 수 없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반복해서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 관한 어떤 것이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을 당혹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결국 바울은 “아직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와 그의 동시대 사람들 중 일부는 예수가 죽었을 때 아마도 살아 있었을 것이지만, 이 주석의 독자 중 누구도 아직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울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에 대한 답변은 그가 단체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동시대인들과 자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인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본질적으로 “인류가 여전히 죄라는 혼란에 갇혀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죄가 인류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갈 수 없게 만들었을 때, 하나님은 은혜롭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류에게 해당되는 것은 개인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 때문에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를 죽음의 대가로 치르더라도 말입니다. 바울은 아마도 우리가 기억하는 한, 예수님을 따르려고 노력한 상대적으로 선한 많은 그리스도인들보다 이것을 더 잘 이해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바울 사도가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느라 바쁜 동안 하나님은 은혜롭게 손을 내밀어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바울이 회개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동안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뜻을 피하여 도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은혜롭게 돌이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러틀리지는 우리가 깊이 미워했거나 우리를 해친 사람이 우리의 생명을 구하는 것을 상상하도록 초대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사람을 보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지 않을까요? 이제 당신이 한때 경멸했던 그 사람이 당신의 생명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당신을 위해 그녀의 생명을 바쳤다고 상상해보세요. 혹시 총을 맞아서요. 그것은 당신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이사야서 53장에서 선지자는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느니라 … 그가 징계를 받아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암 진단은 저의 연약함과 죽음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세계적인 유행병은 적어도 우리 중에 일부에게 죽음에 대해 정신이 번쩍 들게 하였거나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죽음에 수반되는 고통과 괴로움을 두려워합니다. 나는 때때로 죽음이 가져올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이 두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번 주일 서신서 교훈은 입양된 하나님의 자녀가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한 가지 이유를 상기시켜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셨고, 죽으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오늘 주일 아침, “목숨을 바칠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은 누구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에 따르면, 바로 ‘우리’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말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가능성이 없다는 점은 9/11에 펜실베이니아 주 샹크스빌(Shanksville) 밖에서 일어난 일을 미국 설화의 극적인 부분으로 만드는 요인의 일부입니다. 그 끔찍한 날을 살아남은 사람들은 결코 잊지 못할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유나이트 93번 항공편(United Flight 93)의 승객들이 그들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와 같은 낯선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바쳤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그것을 깊이 소중히 여깁니다. 사실, 그들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죽음이 자신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찢어지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이 유나이트 93번 항공편을 타고 백악관이나 수도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끔찍합니다. 나는 그 승객들이 9/11에 동료 미국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았더라면 미국이 여전히 회복 중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선천적으로 불경건한 죄인들을 위해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곤경이 얼마나 더 끔찍했을지 상상해보십시오.
로마서 5:1-8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