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2:34-46 주석

주해, 질문, 그리고 관찰 

예수님은 여전히 성전에서 자기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성전 지도자들과 대립하고 계십니다. 지난주 본문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자기 제자들을 보내 예수님께 질문하게 했고, 그 본문과 오늘 본문 사이에는 사두개인들도 예수님을 시험하는 데 한 차례 가세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바리새인들이 등장합니다. 사두개인들의 실패를 보고 직접 나선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의도는 여전합니다. 15절에 따르면, 그들은 예수님이 말실수를 하거나 부적절한 답을 하기를 기대하며 질문합니다. 지난번 질문에 정치적 함정이 있었다면, 이번 질문은 가장 중요한 종교적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흠잡을 데 없이 정확합니다. 당시 듣고 있던 누구도 쉐마(Shema)—“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가 가장 큰 계명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하루 두 번씩 암송했습니다.

그들은 하나의 계명을 물었고, 예수님은 그들이 예상했던 답을 주셨습니다. 계획이 실패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도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첫째 계명과 같은 둘째 계명을 덧붙이십니다. 그 역시 사랑에 뿌리를 둔 계명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나님만이 아니라, 우리 주변 사람들을 향한 사랑까지 함께 명하십니다.

사실 이것은 새로운 계명이 아닙니다. 이미 모세 율법 안에 있던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두 계명을 강조하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 속에서 우리가 바르게 살아가도록 주어진 하나님의 법은 결국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축으로 요약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의 계명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의 존재를 지탱하는 닻입니다. 경건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고, 사방으로 흘러넘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해 보면, 사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하니, 우리는 넘쳐흐르는 사랑의 강물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창조 세계가 사랑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기능이자,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증거입니다. 만일 율법과 선지자의 메시지를 단 한 단어로 요약해야 한다면, 예수님에 따르면 그 단어는 “사랑”입니다. 바울도 에베소서 3장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이 본문들에 사용된 “사랑”은 모두 헬라어 명사 아가페(agape)에서 나온 동일한 동사입니다. 헬라어에는 여러 종류의 사랑(philos, agape, eros)이 있다고 많이 설명되지만, 가장 단순하게 말하면 아가페 사랑은 모두의 번영(flourishing)을 추구하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세워가는 사랑이며, 가장 넓은 차원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은 결국 세상을 세워가는 일이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방식입니다. 하지만 죄로 인해 우리는 실패하기에, 하나님은 율법과 선지자들을 주셔서 우리를 원래의 자리로 다시 부르셨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모든 메시지는 결국 같은 목적을 향합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방식대로 세상을 세우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이 추가 설명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질문을 하시기 전에 그들에게 대답할 기회를 주셨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다소 엉뚱한 전환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그리스도)에 관한 질문을 점점 더 자주 하시기는 했지만, 이것이 어떻게 가장 큰 계명 이야기와 연결되는 것일까요?

그러나 이 질문 역시 유대 신앙의 핵심 교리를 상기시키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흩어져 있던 성경의 조각들이 서로 연결될 때, 사랑의 메시아 안에서 얼마나 더 위대하고 깊은 토대가 드러나는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첫째 계명에 둘째 계명을 더하심으로써, 신자의 삶은 단지 “위”를 향하는 것만이 아니라 “옆”으로도 확장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눈앞에 늘 있었지만 그들이 놓치고 있던 중요한 신학적 통찰을 짚어 내시며, 하나님 안에서는 언제나 우리가 더 배워야 할 것과 새롭게 밝혀져야 할 진리가 무궁무진하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사랑은 우리의 존재를 넓히고 지식의 지평을 확장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우리를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신앙의 교리와 확신에 너무 안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만큼이나 중요한 또 다른 관점이나 진리를 놓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진리의 한쪽 면에만 집중하다 다른 면을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이 자신의 자손을 동시에 “주”라고 부르는 사실을 지적하십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바리새인들이 알고 있던 한 가지 답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이었고, 예수님도 그것을 인정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메시아에 대한 이해가 완전하지 않습니다. 시편의 신비로운 표현 속에 이미 그 사실이 드러나 있었습니다. “주(Yhwh)께서 내 주(Adonai)께 말씀하시기를…”

앞선 두 사랑의 계명과 마찬가지로, 답을 여는 열쇠는 이미 그들 눈앞에 있었습니다. 다만 서로 연결 짓지 못했을 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무엇이라 답해야 할지 몰랐고, 머릿속으로도 그 의미를 풀어낼 수 없었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 질문이 바리새인들의 질문 공세를 끝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침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의미의 침묵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사랑의 두 축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배우고, 동시에 자신들이 가진 하나님의 계획, 즉 메시아에 관한 이해가 얼마나 불완전했는지를 깨닫게 되자, 바리새인들은 어느 정도 겸비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세세한 조항에 대한 그들의 집념을 오히려 사용하셔서, 말씀의 세밀한 표현들이 결국 사랑에 뿌리내린 더 크고 장엄한 현실을 가리키고 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세상이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메시아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다는 사실도 보여주셨습니다.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계속해서 우리가 딛고 선 안일한 기초를 뒤흔드셔서, 우리의 삶 역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처럼 더욱 크고 풍성한 사랑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해설 포인트

이 본문에는 세 개의 구약 본문이 인용됩니다. 예수님은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의 계명으로 율법과 선지자를 요약하십니다. 그리고 시편 110편 1절을 사용하여, 메시아가 단지 다윗의 자손만이 아니라 다윗의 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바리새인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 본문을 사용하시는 방식은 그 말씀들에 더 크고 깊은 의미가 있음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이해의 기초를 흔드시는 동시에, 같은 성경의 조각들로 새로운 기초를 다시 세우십니다.

예화 아이디어

캐나다의 캐필라노 현수교(Capilano Suspension Bridge)는 길이 약 137미터(450피트), 강바닥에서 약 70미터(230피트) 높이에 매달려 있습니다. 이 다리는 단순 현수교 구조인데, 중간에 지지 기둥이 없이 양 끝의 케이블과 앵커만으로 버텨집니다. 그 앵커는 양쪽에 각각 약 13톤에 달하는 콘크리트 구조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현수교를 걸어보면 흔들리고 불안정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리의 앵커를 신뢰하듯, 가장 큰 두 계명과 메시아 되신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걸어가야 합니다.

또한 데일 브루너(Dale Bruner)는 그의 주석 『The Churchbook』(마태복음 12–28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랑의 계명들을 통해 예수님은 “믿는 자들의 마음을 태양을 향해 피어나는 꽃처럼 열어, 사랑의 삶으로 이끄신다. 우리는 사랑하도록 지음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