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희망을 가장 서정적으로 표현한 것 중 하나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첫 번째
문답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곳에서 개혁주의 신앙인들은 “살든지 죽든지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과 영혼과 사나
죽으나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교리문답의 저자보다 약 1500년 전에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주일의 서신
교과는 적어도 교리 문답의 첫번째 질문과 대답을 바울이 온 맘 다해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생각케 합니다.
Lectionary의 편집자들이 본문들을 선택함에는 경건한 지혜가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따라
설교하는 이들에게 성령의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온전한 계획을 선포하기 위한 훌륭한
지침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Lectionary의 가장 큰 결함 중 하나는 특정 본문들을 시작하고
끝내는 위치를 선택하는 데 있습니다. 확실히 이번 주일 서신 교훈의 경우입니다. 단지 한
장의중간에서 시작되는 것 뿐 아니라 빌립보서 1:21-30은 단락의 중간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공과의 선포자들은 주어진 본문 1:21-30 에 중점을 두더라도 봉독은 1절이나 12절부터 읽는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이번 주일 서신 교과의 맥락을 우리의 본문 선포에
추가하기를 추천 합니다.
더글라스 무(Douglas Moo)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신을 후원해 준 교인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격려하기 위해 편지를 썼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1: 21-30은 이 두 가지 주제를 다룹니다.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21) 라고 노래하며 시작합니다.
후반부의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는 기독교인들의 여러 오래된 묘비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 사형 선고를 받게 될 것이 확실한 노령의 사도에게특히 대담한 말입니다. 빌립보서
1장을 선포하는 사람들은 21절을 좀더 풀어보고 싶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바울이
자신에게“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말할 때 바울이 의미하는 바를 탐구할 수 있습니다. 성경
학자들은 이것에 대해 여러 가지 다른 추론을 이끌어 냅니다. 그러나 거의 모두가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과 그의 삶이 친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기뻐하고 있다는 생각에 의견을 같이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갖기 위해 죽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신실한 관계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 가운데 이 땅의
삶에서 그분과 완전한 인격적 관계를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도 바울은 그에게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덧붙입니다. 그의 죽음은 그가 이미
견디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큰 고통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운데 바울로 하여금 고통이나 죽음의 여지가 없는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 안에
자리를 얻게 할 것입니다.
아마도 역사상 21세기 북미보다 더 죽음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사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본능적으로 죽음이나 죽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죽은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한동시대인들의 불확실성이
커가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신학자 N.T. Wright는 서구 문명이 죽음에 관한 여러 이론을 받아들였다고 지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의식이나 무의식의 거대한 바다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가정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단순히 우주에 흡수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빌립보서
1장을 선포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특정 문화가 죽음과 그 이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는지 조사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과 그 이후에 대한 사회의 모든 추측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실한 관계 안에서 죽는 사람들의지위는 난공불락이라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그것은 정말로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딸로, 예수님의
형제자매로 삼아 주셨습니다. 삶과 죽음 모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신실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다. 바울은 Wright가 쓴 것처럼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인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안에서 죽은 자들은 결국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23) 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미 감옥에서 주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확실히 기대하는 것처럼 그가 어떻게든 감옥에서 살아남는다면 계속해서 “열매
맺는 수고”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22). 그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과 복음을 충실히 받아들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충실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격려하는 일을 병행하여 계속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자신이 할 일이 더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래서 그는 빌립보
교인들을위해 자신이 감옥의 시련에서 살아남는 것이 “필요하다”(24) 라고 주장합니다. 사도는
이 본문 뒷 부분에서 빌립보 청중이 왜그가 이 시련에서 살아남는 것이 필요한지 이유를
설명합니다. Douglas Moo는 그 이유를 빌립보 교인들을 분열시키는 모든것에 직면하여 단결을
유지해야 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빌립보서는 Scott Hoezee가 불렀듯이 바울의 편지 중 “가장 따뜻한” 편지라고 할 수 있지만
빌립보 교회의 상황은 다소 불안했습니다. 성도들이 교회 안팎의 위협에 직면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위협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실한 관계의 열매인성도간의 연합에 실존적
위협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 대한 외부의 위협이 무엇인지 언급 하지 않습니다.
Moo는 아마도 나중에 3장에서 암시하는 거짓 선생들과 그들의 가르침일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아니면 사도가 그 어떤 특정인을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1장을 처음 쓴 지 2,000년이 지난 후에도 그것을 읽는 교회는 여전히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이들의 놀라운 숫자가 믿음 때문에 계속해서 고통을 겪고 죽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선포하는 이들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역경의 사실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그 사실들에 관한 웹사이트들을 검색하는데
시간을 할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기독교 분열이 교회 외부에서 부과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 본문의
교훈을 선포하고 듣는 미국인들은불안정한 정치적 시기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적으로 너무 분열되어 있어서 의견이 다른 그리스도인형제 자매들과 교양
있는 방식으로 대화를 나눌 수 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거기에다 세계적인 전염병과 인종차별에
대응하는방법에 대한 의견 불일치까지 더해져, 예수를 따르는 이들 사이에도 깊은 분열이 종종
생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비록 바울의 상황과 같지는 않지만2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도, 27절의 “무슨
일이든지”는 심오한 의미가 있습니다.누가 미국 대통령과 다른 지도자로 선출이 되었던지
“너희는 복음에 합당하게 처신하라”(27)는 바울의 말을 듣습니다. COVID-19와 관련해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너희는 복음에 합당하게 처신하라.” 인종적 정의와 화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무슨 일이 일어나든 “너희는 복음에 합당하게 처신하라.”
“복음에 합당한 태도”라는 문구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든, 적어도 그 복음을 통해 하나님으로
부터 부르심을 받은 그 위치와특권에 일치하는 행동을 요구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안녕을 위해 의견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도 함께 일할 수
있는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겸손하고 자기 희생적으로 소외된
자들과 작은 자들을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을 선포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복음의 핵심 부분이 아닌 것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우리 마음과 삶을 돌아볼 때
유익을 얻을 것입니다. 또한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고, 위험에 처한학생들을 멘토링하고, 갖가지
자연 재난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기 위해 우리 주변의 그리고 다른 나라의
기독교인들이 서로의 차이들을 넘어 함께 연합하는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29절과 30절에서 경고한 것처럼 그렇게 실천 하는 것은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열정을위해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할” 것입니다(29). 주님을 위해 단지 잠재적으로 우리의 안녕과 생명까지 위험에 빠질 뿐
아니라 또한 세상가운데 하나님의 관심을 좇기 위해 우리의 타고난 이기심과 야망을 포기할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예수님의 운명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만의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 동시대의 핍박받는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운명만이 아닙니다. 고난은
예수님을 따라 그분이 당신의 생명을 바치신 세상으로 들어가려는 모든 사람의 운명이기도
합니다.
예화 아이디어
그의 저서 Terms of Service에서 Jacob Silverman은 PayPal 공동 창립자이자 Facebook의 초기
투자자 에 대해 씁니다. Silverman은 그 사람이 “죽음의 불가피성을 ‘이데올로기’로 비웃으면서
동시에 ‘노화를 치료’ 할 수 있는 회사에 수백만달러를 투자했음을 지적합니다. Google 도
Calico라는 생명 공학 자회사를 통해 수명 연장 연구에 대한 첫 번째 투자를 시도했는데 마치
비용을 지불하면 죽음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반영 하는 것 같습니다.”
빌립보서 1:21-30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