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시즌의 일곱 번째 주일의 첫 본문으로 예수님의 승천에 관한 본문이 지정된 것은 좋은 결정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하나의 영광스러운 행위의 두 부분이라는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셨고 계속해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부활과 승천 사이에 40일 동안 예수님은 중요한 일을 처리하셨지만 누가는 그 두번의 올리심이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마지막 행위인 것처럼 말합니다.
“오 데오빌로여 내가 전에 쓴 책에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여 승천하신 날까지 기록하였노니…” 이제 제 두 번째 책에서 저는 예수님이 하늘로 올려지신 후에 계속해서 하신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 사역의 첫 번째 부분은 성령의 능력으로 그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분의 몸이 하늘로 올라갔고 그것이 예수님의 사명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두 번째 부분은 성령의 능력으로 그분의 몸인 교회를 통해 하늘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내용입니다. 어떻게 승천하신 예수님이 세상을 바로 세우기 시작하셨는지(참조, 행 17:6 KJV 및 RSV), 그래서 하나님이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발적인 백성이 되었는지를 다룹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40일 동안 두 가지 일들을 하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사도들에게 자신이 정말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음을 확신시키고 하나님나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알리기 위해 그분의 사도들은 그분의 부활에 대해 온전히 확신하는 증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집중적인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제자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그것은 어리석은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관해 가르치시는 데에 방금 40일을 보내셨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마음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좋은 유대인이었기에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구약의 모든 예언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누가의 기록에는 확실히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가랴의 찬송과 마리아의 찬송(Benedictus and the Magnificat 베네딕투스와 마니피캇)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초기부터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질문에 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질문자들의 방향을 바꾸심으로 응답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계획을 알고 있다고 잘못 생각했고,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실제 계획을 설명하셨습니다. “때와 기한은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그리하면 너희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두 의제가 얼마나 정반대였는지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은 “당신은…”라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너는…할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시고, 그들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시고, 그들의 종이 되시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이미 모든 것을 다 하셨고 이제 그들을 예수님의 종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이때….”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때를 아는 것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그들의 시간표대로 진행하기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 시간표를 주관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나라 회복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예수님은 세상에 대한 그들의 증언에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그들은 왕국이 그들 자신의 삶에 임하기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온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왕이 되어 그들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왕이 되셔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의 의제는 그들이 정상으로 올라가는 것이였지만 예수님의 의제는 하나님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미래를 위한 의제를 정하실 때 특별히 주목할 만한 두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과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은 반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다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특히 제 신학 써클에서는 그렀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향을 가진 사람들은 개인 전도를 배제하고 사회 정의 문제에 더 관심을 보이는 반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데 헌신하는 사람들은 사회 정의 문제가 교회를 제자 삼는 진정한 사명에서 멀어지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와 증인의 즉각적인 병치는 예수님이 두 가지 모두를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확장됩니다. 사람들이 회심할 때 그들은 제자가 되어 살아계신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하나님 나라에 합류합니다. 그러한 증거의 결과로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에게만 임하지 않고 땅 끝까지 임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것이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목표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인해 지금 하나님 나라에 있는 사람들은 모든 삶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증인의 일부로서 사회 정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본문의 의제 설정 부분에서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성령의 중심성입니다. 예수님은 때를 염려하지 말고 성령에 집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하나님 나라를 증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며, 당신이 증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령의 능력에 의한 것입니다. 당신은 곧 왕국 분쟁에 들어갈 것이고 당신은 이 세상 왕국을 대적할 힘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얼마나 대담하고,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얼마나 짜릿합니까! 11명의 사도들과 몇몇 다른 남자들 그리고 몇 명의 여자들, 총 120명이 단순히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땅 끝까지 전할 수 있습니까? 예, 가능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땅 끝까지”라고 하시고 나서 땅을 떠나신 것이 우연일 수 있습니까? 그분의 마지막 유언과 증거는 즉시 그분의 마지막 구원 행위로 이어졌습니다. 예, 구원의 행위!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라(요 16:7).” 그래서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지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올려져 가매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아니하더라.” 그들 중 아무도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을 본 사람이 없었지만, 그들 모두는 그분이 지상에서 올라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각에 대한 언급의 빈도에 유의하십시오.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오늘날 사람들은 목격자의 증언을 폄하합니다. 보는 행위 자체가 사실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도들(그리고 그들의 눈을 믿을 수 있도록 40일을 보내신 예수님)에게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만들어 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 일들의 증인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면서 세상에 다닐 때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부활(그리고 이제 승천)의 실재에 달려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일어나시고 땅에서 올리우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그들이 주장하는 주님과 그리스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 서서 영원히 하늘을 쳐다볼 수는 없었습니다. 천사들은(아마도 한 학자는 그들이 모세와 엘리야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들에게 입을 다물고 놀란 발을 움직이라고 촉구하면서 예수님이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행하신 것처럼 극적인 약속을 했습니다. “이 예수는…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자신의 재림을 분명히 가르치셨지만, 이런 구체적인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한 몸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분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다시 오실 것이므로 그분의 재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약의 서신이 재림에 대한 암시로 가득 차 있는 것도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그분의 부활뿐 아니라 그분의 재림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들은 그들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말씀과 행동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제안한 것처럼) 감람산에 초막을 짓기 위해 서둘렀습니까? 시편의 lectionary 처럼 할렐루야의 외침과 찬양을 드렸습니까? 그분의 부재에 슬픔을 안고 성금요일에 그랬던 것처럼 각자의 삶으로 다시 흩어졌습니까? 아니면 그분의 약속을 기뻐하며 그들의 집으로 급히 돌아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의 이야기를 전했습니까?
위의 어느 것도 아닙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께서 명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그들이 어떻게 성령을 기다렸는지 보는 것은 흥미롭고 유익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하려면 기다리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여기에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그들이 머물고 있는 위층 방으로 올라갔습니다(그들이 성목요일(Maundy 목요일 밤을 보냈던 것과 같이?).” 우리는 스스로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주목하십시오. 한 사도의 부재가 너무나 중요해서 그들의 첫 번째 업무 항목 중 하나는 열두 번째 사도를 임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가가 여성들을 기다리고, 기도하고, 증거하는 단체에 포함시키는 것을 어떻게 지적하는지 주목하십시오(요엘의 예언이 오순절에 이루어질 예표입니까?). 그들은 모두 함께 있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다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바꾸도록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계시된 뜻을 행하시기를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실 예정이라면 왜 그들이 그것에 대해 기도했을까요?
그것이 때때로 우리가 기도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행하실 것인데 왜 귀찮게 기도해야 합니까? 그것은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과 초대 교회에 관해 우리가 읽는 모든 것과 상반됩니다. 아마도 서방 교회는 우리가 성경에서 읽은 계시를 우리의 이성으로 압도하고 있기 때문에 초대 교회처럼 교인을 얻는 것이 아니라 교인을 잃는 것일 수 있습니다. 10일 동안 교회는 “집중하여 기도에 힘쓰”더니 바람이 불고 교회가 성장하여 하나님나라가 땅 끝까지 확장되었습니다.
부활절 시즌의 일곱 번째 주일인 승천 주일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계속되는 사역을 기념하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증거할 능력을 주시기를 쉬지 않고 기도하며, 실제로 세상에 나가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모든 영광속에서 올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사도행전 17장 6절(KJV 및 RSV)에 등장하는 “세상을 뒤집는” 사도들에 관한 문구는 사도행전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설교할 수 있게 해주는 강력한 관점입니다. 사도들은 실제로 세상을 바로 세우고 있었습니다. 훌륭한 책인 『마음의 혁신』 (Renovation of the Heart)에서,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는 거꾸로 된 세상이 어떻게 모든 사회를 망치는지 요약합니다. “모든 성공적인 사회의 쇠락의 시기는 사회의 성공과 번영이 자신 덕분이라고 믿고 스스로를 숭배하기 시작할 때, 애초에 하나님 안에서 성공할 수 있게 해준 이해와 관행에 반항할 때 시작됩니다.” 그는 세상의 문제 이면에는 “인간 마음의 근본적인 악, 즉 하나님 대신에 나를, 내 마음을 하나님으로 삼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세상이 바로 세워지고 하나님이 다시 왕이 되시고 우리가 기꺼이 그분의 백성이 될 때까지는 세상은 거꾸로 되어 있으며 세상을 바꾸려는 우리의 어떤 시도도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를 회복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성령의 능력 있는 증거에 달려 있습니다.
사도행전 1:6-14절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