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가운데 실제로 팔복beatitude의 형태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라는 어조로 시작합니다. 잘 알려진 마태복음 5장을 포함하여 팔복은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렇게 특별하지도복 받지도 못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축복의 메시지 입니다. 확실히 그것이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패자로 간주하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팔복의 축복을 선포하셨습니다. 시편에서도 유사한 메시지를 담고있습니다. 대담하고 용감한 사람만이 성공하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조용히 경건하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뒤쳐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온유하고, 마음이 상하고, 경건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앞서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많은 시편 기자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축복을 선언합니다. 그들이 더 깊고 더 영구적이며 참되고 영원한 진리와 좀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더 다루기로 하고…. 먼저 시편 112편의 기자가 의인에 대한 이 팔복으로부터 갑자기 아주 웅대한 선언으로 이동하는 걸 보게 됩니다. 이런 종류의 웅대한 선언들은 여러 시편에 나타나 있는데 여기서 이 선언들을 접하면서 왠지 1980년에 로널드 레이건 후보가 카터 대통령과 나눈 논쟁에서 말했던 유명한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There you go again . . .” “또 그러네 . . .” 물론, 장기적으로 의인이 더 나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건 먼 훗날의 얘기 아닙니까? 바로 이 의인들이 쉬운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거창한 주장을 듣습니다. 모든 것이 순탄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자녀들이 다들 최고가 될 거라고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넉넉히 나누어 주고도 남을 만큼 많은 돈을 갖게 될 것이라고. 밤낮으로 평안한 삶을 살 것이라고. 이런 웅대한 선언을 하는 시편기자에게 “또 그러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세상의 매일 현실과는 거리가 먼 허황된 예측을 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더욱이 악인이 의인의 형통함을 보고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하는 주장은 납득이 가질 않는다고 말입니다.
진실은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사악한 자들, 사기꾼들, 세금 횡령자들과 심지어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사임 당하면서도 엄청난 보너스를 받는 비열한 CEO들의 성공과 발전에 대해 의인이 이를 간다는 것입니다. 시편 112편은 삶이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가장 간절한 소망을 표현하고 있고 먼 훗날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 . . 글쎄, “또 그러네” 라고 느껴지게 하는 현실과는 고통스럽게 미치지 못하는 반대되는 그림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현실이 될 것이라는 그 진실 외에도 시편 112편에는 집중해 음미할 가치가 있는 다른 진리들이 있습니다. 특히 7-8절이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정하였도다. 그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그 대적의 받는 보응을 필경 보리로다”
특히 “흉한 소식”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은 좀더 상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의인에게 나쁜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으로도 압니다. 도리어 그보다는 과거의 악행이나 죄, 또는 범죄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올바른 삶을 살 때 금전적으로나 건강이나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안녕이 잘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악인처럼 15년 전에 저지른 끔찍한 범죄를 누군가가 알아낼까 봐 걱정하며 밤샘하는 일은 없습니다. 과거 저지른 온갖 혼외정사가 밝혀져 결혼생활이 망쳐지면 어쩔까 초조하게 긴장하는 시간을 보내지도 않습니다. 옷장에 감춰진 해골 같은 어떤 비밀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지도 않습니다.
이 시편이 말하는 대로 악인의 처지는 얼마나 다른지요! 걱정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의 과거에 대한 충격적인 폭로 형태의 흉한 소식은 언제든지 터질 수 있습니다. 현재 아무리 성공을 거두어 보이더라도 그것은 종이 카드들로 세운 집과 같아서 단 한번의 바람이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The Sopranos라는 TV 시리즈의 사악한 캐릭터들이 생각납니다. 주인공 토니 소프라노는 멋진 집, 멋진 자동차, 온갖 돈이 여기 저기에 숨겨져 있는 성공적인 마피아 보스였지만 결코 긴장을 풀 수 없었습니다. 그는 결코 평온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언제든지 공격을 당할 수 있고 자신이 오랫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었던 바로 그 폭력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종회의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해석 하느냐에 따라 토니가 결국 그런 대가를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남에게 흉한 소식을 퍼뜨리며 인생을 보낼 때, 흉한 소식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을 밤낮으로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에 반해 의인은 안전합니다. 과거의 어떤 유령도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망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진실을 말했기때문에 악인처럼 과거 수년 동안 그들이 한 모든 거짓말을 관리하고 기억하려고 모든 시간을 할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악의 삶을 사는 것은 피곤한 삶입니다. 숨길 것이 없는 평온함과 안정감을 갖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의인은 부요하고 행복하며 영원히 문제나 질병이 없다는 시편 112편의 가장 문자적인 묘사는 현재로서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치 시편1편이 묘사하는 시냇가에 심어진 뿌리 깊은 나무와 같이 영혼의 안전함은 지금도 확실히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인은 잊혀지는 반면 하나님은 의인을 “영원히 기억”하실 것입니다. 세상 날의 끝이 오면 의인은 반석처럼 드러날 것이며 악인은 마침내 아무 것도 아닌, 바람에 흩날리는 겨처럼, 아무 실체도 없이 오직 반짝였다 사라져 버릴 것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의인은 복이 있나니” 시편 112편의 첫 팔복은 선언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화 아이디어
다음은 Frederick Buechner가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의 팔복에 대한 결론입니다: “예수께서 누가 봐도 지는 편이고 고통 가운데 있지만 하늘에 속한 이들을 위해 축복을 선포하십니다. 청중의 얼굴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직접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상류층 군중이라고 부를 수 없는 대부분 소작농과 어민들로 초라하기 그지 없고 그들 사이에 어떤 영웅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주름진 얼굴이 예수께 향하고 있습니다. 당신으로 인해 핍박을 받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다가올 고난이 아닌 그들에 대한 관심과 염려에 찬 마음으로 곧 주님 당신의 온유함과 자비, 곧 순결한 마음으로 말씀하십니다.”
Frederick, Buechner, Whistling in the Dark: An ABC Theologized.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8, p.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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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2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