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9:33-40 주석

렉셔너리는 때때로 방대한 히브리어 아크로스틱(Hebrew acrostic: 22개의 히브리어 알파벳을 각 행의 첫 글자로 순서대로 사용하는 방식; 역자 주) 시인 시편 119편의 한 단락을 언뜻 무작위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채택하곤 합니다. 이번 주 렉셔너리 A해 본문은 이 시편의 다섯 번째 단락이며, 여기에 속한 8개 구절의 첫 단어는 모두 히브리어 알파벳 다섯 번째 글자인 ה(헤)로 시작합니다. 시편 119편의 각 단락은 대부분 내용이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와 명령과 규칙 등을 찬양하는 일반적인 내용 외에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이 무엇일까요? 눈에 띄고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까?

제가 이 구절들을 읽었을 때, 아마 여러분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제 눈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뻐한다는 사실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시편 119편 전체가 하나님의 율법을 향한 열정적인 사랑의 증언입니다. 율법은 찬란하고, 아름답고, 우아하며, 기쁨과 빛, 생명과 즐거움의 원천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복과 상급과 번영으로 이끕니다. 시편 119편의 기자는 율법이 샬롬으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더 말할 필요도 없이 명백합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에서 시편 기자가 자신을 의의 길 위에 머물러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거의 애원하다시피 간청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여기에 나열된 일련의 동사들을 한번 보십시오.

나를 가르쳐 주소서(Teach).

내가 깨닫게 도우소서(Help).

나를 인도해 주소서(Direct).

나의 마음을 주께로 .. 돌이켜 주소서(Turn).

나의 눈이 헛된 것을 보지 않게 .. 돌이켜 주소서(Turn).

수치를 거두어 주소서(Take).

이 시인처럼 하나님의 율법을 그토록 명백하고 깊이 사랑하는 사람조차도 여전히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너무나도 분명하게 하나님의 규례가 얼마나 훌륭한지 머리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발이 무가치한 것들을 쫓으며 방황하거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자신의 사리사욕만 채우는 쪽으로 휩쓸리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은혜가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33절).

이 8개 구절은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죄 많고 타락한 이 세상에서, 비록 가장 선한 의도를 품고 있고 그 누구보다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그분의 길에 충실하기 위해 평생 자신과 치열하게 줄다리기를 벌입니다. 프레드 크래독의 설교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 각자는 자신의 가장 선한 의도라는 하늘과 현실이라는 땅 사이에서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존재들입니다. 혹은 사도 바울의 고백을 빌리자면, “나는 내가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온전히 한결같이 행하지는 못합니다.

시편 119편에 담긴 이 솔직함이 놀랍지 않습니까? “오 하나님, 주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안전하며,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와 반대되는 온갖 유혹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우리를 좌우로 치우치게 하는 유혹들은 때로 외부에서 다가오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그 유혹의 손길이 우리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소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다시금 일깨워 주소서. 주 하나님이시여, 부디 이 모든 일을 끊임없이 행하여 주소서!”

성경은 일관적으로 모든 형태의 자기 의를 경계합니다. 예수님께서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속은 비열하고 뒤틀렸던 바리새인들에게 가장 분노하셨던 것도 바로 이 자기 의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신 것에는 그들의 위선도 한몫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화나시게 한 것은 자기를 완벽하게 도덕적이고 의롭다고 여긴 그들의 자만심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로 그 교만 때문에 자기 의를 신뢰했고, 그 결과 자신들을 인도하시고, 일깨워 주시며,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실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역사 속에서 등장하는 그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저 천국 입장권을 주는 분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천국 입장권을 자신의 힘으로 얻었다고 믿었으며, 그것을 자기 노력에 대한 마땅한 대가로 여겼습니다. 바로 부자 청년이 그런 경우였습니다. “예수님, 저는 의로움을 완전히 이루었습니다. 제게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가 기대한 대답은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그가 스스로 천국에 이르는 길을 찾아낸 것에 대해 보상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생각을 완전히 뒤흔드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19편의 이 단락 끝에서 이렇게 간청합니다. “내 생명을 보존하소서!” 이는 의지할 분이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의 진실한 외침입니다. 부자 청년은 슬픔에 잠겨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그저 언젠가 그가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은혜와 의의 길에서 넘어질 때마다 그를 일으켜 주시는 성령님의 손길을 깨달아 진정한 기쁨을 발견하게 되었기를 바랄 뿐입니다.

시편 119편의 이 단락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도 바로 이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기쁨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화 아이디어

시편 119:33-40 본문을 이 주석이 제시하는 방향으로 설교한다면, 예배 찬양으로 ‘Lead Me, Guide Me’가 적절합니다. 이 곡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두신 의의 길 위에 머무르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찬양하는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그 길에서 벗어나 방황하기 쉬운 지도 고백하는 신앙의 역동적인 긴장을 아주 잘 담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손을 거두시면 나는 길을 잃고, 주님의 빛이 없으면 나는 눈먼 자 되네.”

이 가사는 시편 119편의 이 단락이 전하고자 하는 전반적인 정서를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또한 이 가사는 사무엘 존슨이라는 작가가 남긴 말로 자주 인용되는 문구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가르침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일이 훨씬 더 필요하다.” 물론, 인생을 살다 보면, 진정한 도덕적 딜레마에 직면하게 되는 상황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단지 성령의 인도하심 없이는 올바른 선택을 실천할 수 없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