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0:1-8 주석

이 시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 분류되지만, 시의 내용은 오히려 내려가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예전 성경들은 이 시편을 “깊은 곳에서”라는 의미의 라틴어 “De Profundis”로 불렀습니다. 이 시편이 성서정과 A해(Lectionary Year A)에 마지막으로 배치되었던 때는 2020년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이었고, 당시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초기 봉쇄 조치 2주 차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이 사태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팬데믹의 장기적인 영향에 대한 불안한 현실이 서서히 체감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세상은 팬데믹 이전 상태로 완전히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3년 동안 극한의 절망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방향 상실과 불확실성, 그리고 그와 관련된 감정들이 만연했습니다. 지난번 사순절 다섯째 주일에 이 시편이 배치되었을 때만 해도, 우리 목회자들과 교인들 대부분은 팬데믹의 정치화가 전 세계 교회에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길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팬데믹 자체와 봉쇄 조치만으로도 매우 힘겨웠습니다. 그러나 3년 전의 우리는 그로부터 이어질 교회의 분열과 관계의 단절,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이 무너지는 아픔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깊은 고난 속에서 사역을 이어 왔습니다. 불확실성이라는 깊은 고난 속에서, 두려움이라는 깊은 고난 속에서, 사랑하는 이들의 연약함에 대한 걱정이라는 깊은 고난 속에서, 그리고 우리가 사랑했던 이들이 지난 몇 년간 보여준 모습으로 인한 깊은 고난 속에서 말입니다. 한때 신뢰했던 성도들에게 들었던 상처 어린 말들이 많은 목회자들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맴돌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편 130편의 단순한 메시지를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신뢰와 소망을 주님께 두어야 합니다. 물론,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것은 장식용 십자수 액자를 만들듯 예쁘고 단순한 순간이 아닙니다. 시편의 간결한 구절들을 마치 모든 문제의 만병통치약처럼 가볍게 내뱉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고난의 깊은 곳은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신뢰해야 하는 곳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 신뢰가 가장 어려운 때이기도 합니다. 고난의 깊은 곳에서 우리는 선한 의도로 경건한 위로를 건네는 이의 얼굴에 대고 그 말을 되받아쳐 버리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평범한 시절(혹은 좋은 시절)에는 아무렇지 않게 들렸던 달콤한 말들이, 삶이 비정상적이고 고통스러울 때는 사막 폭풍 속에 휘날리는 모래알처럼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 설교자들은 시편 130편에 담긴 신뢰에 대한 권면을 목회적인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 일인지를 충분히 헤아리며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이 시편에 담긴 가슴 저미는 갈망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우리는 시편 기자의 고뇌와 그가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보려고 애쓰는 몸부림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마치 성벽 너머로 칠흑 같은 어둠 가운데서 적들을 경계하며 아주 길고 무서운 밤을 보낸 후, 동쪽 지평선에 떠오르는 분홍빛과 주황빛의 첫새벽 징조를 간절히 기다리는 파수꾼과도 같습니다.

실제로 이 갈망이 얼마나 간절한지, 시편 기자는 6절에서 히브리 시편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표현 방식을 사용합니다. 대개 히브리 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는 구절처럼, 비슷한 단어를 반복하는 병행법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시편 기자는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오히려 같은 단어를 그대로 반복합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개역개정; 시편 130:6)

이 간절함이 느껴지십니까? 우리는 과연 설교를 통해 이토록 처절한 간절함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까요? 아픈 아이의 병상을 지키며 꼬박 지새우는 병원의 밤은 얼마나 길까요? 삶의 이런저런 문제로 걱정하며 잠들지 못하는 밤은 또 얼마나 길게 느껴질까요?

심연의 고통은 정말 그토록 참혹할 수 있습니다. 사실, 대개 그렇습니다. 그러니 인정합시다. 이것이 바로 절망과 갈망을 동시에 표현하는 믿음의 목소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약한 자의 말이 아니라, 오히려 강한 믿음을 가진 자의 절규입니다. 월터 브루그만이 말한 이른바 “금요일의 믿음의 목소리”(the Friday voice of faith)가 바로 이것입니다. 애통, 그리고 갈망입니다.

그러니,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십시오. 그분은 헤세드(chesed), 곧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의 우주적 근원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셨고, 이 세상을 악한 어둠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 사순절 기간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두신 결정적인 승리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승리가 먼저 가장 깊은 고통의 심연에서 시작되었기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는 이 구원이 우리의 가장 깊고 어두운 곳까지 미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그러나 쉬운 메시지는 아닙니다. 가볍게 전할 메시지도 아닙니다. 하지만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 말씀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들어야 할 바로 그 말씀일지도 모릅니다. 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여, 주님께 소망을 두십시오.

[참고: 2023년 성서정과 A해, 사순절부터 부활절까지의 설교 아이디어와 자료를 살펴볼 수 있는 특별한 페이지가 있습니다. 이곳을 클릭해 보세요(Visit this page here)]

예화 아이디어

저는 영화 <쇼생크 탈출>을 정말 자주 봤습니다. 케이블 TV를 통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거나 중간부터 시청한 적이 매우 많습니다. 이제는 인생의 거의 모든 주제를 이 영화에 나오는 장면들과 연결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시편 130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속 주인공 앤디가 운명적인 결정을 내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계획한 쇼생크 교도소 탈출을 감행하기로 한 바로 그날 밤입니다. 그러나 친구 레드(모건 프리맨 역)는 앤디가 절망에 빠져 감옥에서 자살하려 할까 봐 전전긍긍합니다. 앤디가 그날 아침 일찍 6피트 길이의 밧줄을 구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감옥에서 밧줄로 할 수 있는 일이 자살 말고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시간이 마치 “칼날처럼 길게 뽑혀 나오는 것 같다”며 밤새 깊은 걱정에 잠겨 있던 레드의 모습은 시편 130편이 말하는 깊은 절망, 그리고 아침 햇살이 밝아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갈망의 모습과 맞닿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