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쩌면 시편 16편을, 적어도 “내 육체가 안전히 살리라”는 가장 유명한 구절만큼은 잘못 읽어왔을지도 모릅니다. 장례식장에서 9–11절을 인용하며 부활의 의미를 부여하는 설교를 우리는 많이 들어왔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약을 해석할 때 이런 접근이 틀린 것만은 아닙니다. 모든 성경 저자는 성령의 감동에 따라 자신이 인식한 것보다 더 깊은 진리를 말했으니까요. 그러므로 시편 16편이 저자의 의도를 넘어 부활절 이후의 현실, 즉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의 현실을 가리킨다는 해석은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갈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히브리 시인이 대다수 그리스도인이 생각하듯 무덤 너머의 삶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시인이 내 육체가 안전히 쉬리라고 말할 때, 그 본래 의미는 “편안히 잠들 것이다”에 더 가깝습니다. 즉, 그가 원하는 것은 무덤 너머의 부활 생명이 아니라, 무덤에 내려가는 일을 가능한 한 오래—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가진 죽음 이후의 개념을 구약에 그대로 투영하곤 합니다. 하지만 정작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런 개념은 대부분 생소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의인이든, 악인이든, 무관심한 사람이든 모두가 “스올”이라 불리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사후 세계로 간다고 믿었습니다. 10절에 언급된 바로 그 “죽은 자의 세계”입니다. 아무리 경건한 사람이라도 스올에 내려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 시를 쓸 당시 자신을 위협하던 적들로부터 생명을 보존해 달라고, 제발 그곳으로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이 말씀을 “나는 죽더라도 마지막 날 육신이 부활하기 전까지 주님과 함께 기쁨과 복됨을 누릴 것이니 괜찮다”는 식으로 읽는다면, 이는 시편 16편의 본래 의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틀린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즐거움”이나 영원히 “주의 오른쪽”에 거한다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분명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부활 신앙, 즉 우리가 가진 죽음 이후의 소망을 노래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맞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이 시인은 (성령의 감동으로)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한 심오한 진리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 시편 저자가 자신의 고백에 담았던 구체적인 속뜻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절 다음 주일을 맞이하는 지금, 시편 16편을 통해 부활을 선포하되, 영원한 생명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시간을 지나며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함께 되새겨 보았으면 합니다. 사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어떻게 완성하실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우리가 올바로 바라보기만 한다면 오히려 놀라운 진리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마주했을 때 느꼈을 법한 경이로움이 이제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말입니다.
혹시 우리는 복음에 대해 지나치게 무덤덤해져 버린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일이 원래부터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하진 않나요?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놀라움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합니다. C.S. 루이스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저 단순하게 “위대한 기적(The Grand Miracle)”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사건입니다. 도움을 구하는 대상이셨던 그 하나님께서(시편 16편의 시인이 그러했듯) 여인의 태중에서 하나의 배아가 되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엄청난 기적입니까? 그분은 대부분의 시간을 평범한 일상에서 자라다가, 생의 끄트머리에 누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랍비 사역’에 뛰어드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로마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그것도 하나님의 백성 중 일부가 실질적으로 개입한 결과로 말이죠).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으셨고, 세상은 바로 그 육신을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계획의 일부였고, 아니,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죽음을 통해 죽음의 권세를 무너뜨리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16편의 저자라면 이 사실을 지극히 놀라운 일로 여겼을 것입니다. 이는 그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야말로 전혀 새로운 생각이었을 테니 말입니다.
우리의 반응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아야 합니다.
예화 아이디어
지난 3년간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우리는 백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닐 플랜팅가가 지적한 것처럼,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께서 니고데모와의 대화 중 “인자가 들려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며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들었던 일을 언급하셨을 때, 주님이 가리키신 것은 일종의 영적 백신이었습니다. 동종요법처럼, 백신은 우리가 질병을 이겨낼 수 있도록 아주 적거나 약화된 양의 바로 그 질병을 우리 몸에 주입하여 항체를 만들도록 합니다. (물론 mRNA 백신은 고전적인 백신과 방식이 조금 다르지만, 기본 원리는 같습니다. 우리가 피하고 싶은 질병의 정보나 요소를 사용해 그 질병을 막아내는 것입니다.)
복음도 이와 같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반전은 죽음이 죽음을 치료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면역시키신 것입니다. 시편 16편의 시인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대상—즉, 무덤으로 내려가는 그 비참한 사건이—도리어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하나님의 오른편, 그 영원한 즐거움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된 것입니다.
시편 16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