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뮤얼 존슨이란 사람이 우리는 가르침 받는 것보다 더 자주 상기시킴을 받아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Lectionary를 정한 이들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시편 25편을 몇 달 전에도 배정하고 이번 주에 다시 정한 거 같습니다. 아마도 그때 제가 쓴 글 (대부분이 이 설교 주석의 내용입니다만)은 사순절 첫 주일을 맞아 약간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며, 죄인을 가르치고 정기적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시편의 말씀이 이 참회의 계절에 참회의 경종을 울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존슨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가르침을 받는 것보다 더 자주 상기될 필요가 있습니다. 직관적으로 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꽤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엌에서 채소를 썰고 다듬을 때 칼 안전의 기본을 모르는것은 아닙니다. 다만 가끔은 바빠서 도마를 깨끗이 닦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칼끝이 당근 조각에 끼고 칼이 옆으로 미끄러지면서 손가락 끝을 베게 됩니다. 칼 사용법은 한 번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스스로를 상기시키는 것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 중 누구도 다양한 주제나 삶의 영역에서 새로운 배움을 접하는 것이 정말 끝났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평생 학습자가 되기를 열망합니다. 그러나 사실 교육 수준에 관계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동안 우리가매일 접하는 모든 종류의 일에 대해 훌륭하고 견고하며 정확한 교육을 충분히 받아왔으며,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상기하여 그것을 따르고, 올바르게 행동하고, 현명하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지름길을 택했다가 실수를 저지르고나서 “아, 바보같이 왜 그랬지!”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자주 있나요. 사실 우리는 이미 많이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 25편은 하나님의 인도와 교훈을 간구하는 시입니다. 많은 시편은 하나님께 우리의 길에 빛을 비춰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주시고, 무엇이 옳은지 가르쳐 달라고 간구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제자’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가장 기본적으로’학생’을 의미한다는 점을 기억하세요.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인간적으로 완전해져가는) 하나님의길을 평생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본이죠.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의 대부분은 이미 오래 전에 알고 배운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더 자주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솔직히, 그 중 일부는 상식이고,다른 일부는 일반적인 예의이며, 또 다른 일부는 역사상 거의 모든 문명 국가의 법률에 반영되어 있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기본적인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도 우리는 때때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드물지만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잘못을 저질러 적발된 아이들이 “그게 나쁜 짓인지 몰랐어요!!!”라고 말할 때 솔직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어른들도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남자가 아내에게 술집에서 다른 여자와 술을 마신 후 호텔 방으로 초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이 간통죄로 이어질 줄은 정말 몰랐다고 말한다면, 그는 마음속 깊이 알고 있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무엇이 옳은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상기시켜 주면 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우리는 자주 스스로를 상기시켜야 합니다.
또는 이것을 좀 더 영적이고 덜 심리적인 것으로 표현하자면 성령께서 우리를 상기시켜 주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발을인도하시고,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며, 우리가 가야할 길을 한번 뿐 아니라 만 번도 더 보여주실 수 있는 사실을 믿고 우리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은 결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이것은 규칙적인 기도의 문제입니다. 어쩌면 시편 25편과 같은 시편들을 기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영적 청각을 성령의 음성에 맞추고, 성령께서 우리 내면의 도덕적 나침반을 설정하도록 하는 방법을 찾기를 원합니다. 바로, 제자로서 우리는 평생 배우는 사람이 되기를 열망해야 하지만, 종종 우리가 이미 옳다고 알고 있는 것을 행하도록 촉구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평생내내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설교 해설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인생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진정으로 알기 어려운 도덕적 회색 지대가 많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문구가 적힌 팔찌와 티셔츠가 유행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도록 상기시키는 팔찌만 손목에 차고 있으면 바로알 수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무엇을 하거나 무슨말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아는 것이 항상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들을 헤쳐나가는 방법을 잘 모른다고인정하는 이는 나약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강하고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 경우 시편 25편의 말씀은 단순히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가르침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해집니다. 성령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러한 난관과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전달할 수 있는 수많은 좋은 방법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답이 받거나 듣기 쉬운 것은 아니며 때로는 응답이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빨리 알 수 없다고 해서 계속해서 가르침을 구하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9절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가장 잘 받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겸손은 교만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모든 것을 항상 혼자서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은 지혜의 시작이며 어리석음의 반대이기도 합니다. 흔히들 말하듯이 어리석은 사람은 종종 실수를 하면서도 자신만만 합니다. 그들은 배우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지혜로운 이는 하나님의가르침과 성령의 끊임없는 일깨우심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신실한 삶의 일부로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순절 회개의 시기에, 우리가 죄를 고백할 때마다 시편 25편과 같은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이어지며, 다음 번에는이미 알고 있는 바른 것을 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합니다.
예화 아이디어
때때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질문은 겉으로 보이는 모든 매력과 실제로 옳은 모든 것을 고려할 때 다른 질문으로 대체하거나 최소한 다른 질문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무엇을 하지 않으셨을까? 예수님이라면 무엇을 말하지 않으셨을까? 예수님이라면 무엇을 하지 않거나 말하지 않으실지 생각해 본다면, 기독교인들이 때때로 페이스북에서 다른 기독교인들에게, 심지어 기독교 신앙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하는 많은 추악한 말과행동을 피할 수 있을 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님이라면 분노로 가득찬 이메일을 보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게시물에 대해서도 페이스북에서 다른 사람을 비꼬며 비웃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특정 핫이슈에 대해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들에게 비방이나 비열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침묵하거나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안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셨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셨을까요?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우리 중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하는 방식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질문에 답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만, 예수님이라면 하지 않으셨을 일들을 미리제거한다면 우리의 삶과 세상은 훨씬 더 나은 곳이 될 것입니다.
시편 25:1-10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