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Commentary for Sunday, 11월 23, 2025

시편 46 주석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이 만물 위에 주권을 가지시고 다스리신다는 위대한 위로를 선포하는 시편 46편은, 정작 하나님이 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으로서 이 세상을 섭리 가운데 붙들고 계신다는 믿음을 가장 갖기 힘든 순간에 가장 많이 인용되곤 합니다.

2001년 9/11 테러 사건 직후 북미 지역 교회들을 조사한 이들은, 그 다음 주일에 시편 46편이 가장 많이 설교된 본문 가운데 하나였음을 발견했습니다. “산들이 바다에 빠지는 것”을 “고층빌딩들이 무너지는 것”으로 바꿔 읽어 보면, 왜 수많은 목회자들이 바로 그 재난 직후의 어지러운 주일에 이 히브리 시편을 본문으로 삼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보면 시편 46편이 불려진 사례는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시편 자체가 이미 그런 상황을 전제하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흔들리고, 한때는 견고하고 영원할 것 같았던 것들—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산들조차—무너져 내리는 순간들이 충분히 많음을 시편기자는 인정합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편은 현실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커다란 고백입니다. 이 시편기자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해야만 신앙을 붙드는 탈현실 낭만주의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시편은 고난과 전쟁의 한복판에서 탄생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을 꺾고 방패를 부수시며 전쟁을 그치게 하신다고 말하지만, 인류 역사 어느 시점에서든 전쟁은 어딘가에서 계속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비극적으로는 최근 우크라이나에서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시편 46편은 더욱 담대합니다. 현실주의적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오늘의 불안한 뉴스나 개인의 고통에도 믿음을 잃지 않도록 붙들어 줍니다. 피난처는 위협이 없을 때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피난처가 필요하다는 것은 곧 우리가 숨고 보호받아야 할 무언가가 실제로 있다는 뜻입니다.

교회력 C년 마지막 주일, 곧 “그리스도의 다스리심” 주일 본문으로서 시편 46편을 읽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주와 왕이 되셨음을 기억합니다. 바로 이 사실을 시편 46편과 연결하여 선포할 때, 목회자들은 삶의 풍랑 속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평화와 소망을 전할 수 있습니다.

칼빈 신학교에서는 폴 스콧 윌슨의 “네 페이지 설교” 구조를 사용합니다. 그 틀을 아는 이들은 ‘고난’과 ‘은혜’의 대응을 중심축으로 삼는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학생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것은, 설교자가 결코 ‘고난’을 만들어낼 필요는 없다는 점입니다. 교인들은 이미 그 고난을 가득 안고 예배당에 들어옵니다. 지혜로운 목회자는 그들의 삶 속 고난을 제대로 이름 붙일 줄 알아야 합니다. 더 어려운 부분은, 그 현실의 고난 속으로 파고들어 실제로 닿을 수 있는 ‘은혜’를 찾아내어 선포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46편의 땅이 흔들리고 산이 요동하는 묘사를 추상적으로만 설교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의 삶에서 ‘땅이 흔들리는 순간’은 실제 지진보다 훨씬 자주 일어납니다. 소중한 직장을 잃었을 때, 새 일자리에 대한 기대가 무너졌을 때 땅이 흔들립니다. 가정이 흔들리고 결혼이 깨어질 때 땅이 흔들립니다. 미국의 “그리스도의 다스리심” 주일 주간, 곧 추수감사절 주간에, 가족이 모인 식탁 위에서 코로나나 정치 문제로 논쟁이 벌어져, 평화로운 가정의 모습이 산산조각 나는 가정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사랑하는 이가 치매로 서서히 멀어져 가는 것을 지켜볼 때도 땅이 흔들립니다.

“너희는 잠잠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편 46편 기자는 주님의 음성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러나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잠잠히 있어야” 하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바로 소리 지르고 싶을 때입니다. 바로 하늘을 향해 주먹을 흔들며 탄식과 애통의 시편을 토해내고 싶은 그 순간입니다. 사실 그렇게 탄식하는 것조차 정당한 때가 있습니다. 시편 속 애통 시들이 바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또한 잠잠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숨을 고르고, 안개와 연기와 혼란 속에서도 여전히 이 모든 것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보려 애써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손이 못 자국 난 손이라는 사실로 인해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을 그의 손에” 붙들고 계신 분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이십니다. 왕관과 왕홀이나 보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왕권의 증거는 고난의 상처입니다. 그리고 그 상처는 바로 우리가 겪는 삶의 비극과 고통의 자리에서 생겨난 상처입니다.

이제 곧 대림절이 다가옵니다. 목회자들에게는 대림과 성탄을 고요하고 평화로운 계절로 포장하라는 압력이 클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 46편은, 그 모든 아름다운 위로와 소망과 확신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할 때 찾아오는 현실적이고 거친 메시지입니다. 곧, 우리가 설교하는 이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바로 그때 말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루이 암스트롱이 부른 흑인 영가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에는 시편 46편의 진솔한 고난 고백과 동시에 하나님 안에서 피난처와 소망을 발견하는 대담한 선언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암스트롱의 노래 속 슬픔과 고난은 결국 “영광 할렐루야”라는 후렴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고난 속에서도 찬양이 흘러나올 수 있는 이유를 밝히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각자가 겪는 고난을 참으로 아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