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Lectionary 가 왜 이 짧은 시편을 5절에서 시작하고 있는지는 수수께끼와도 같습니다. 우선, 1절이 이 짧은 시의 주제어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둘째, 시편 기자가 왜 하나님 안에서만 안식을 찾아야 하는지, 즉 시편 기자가 적들로부터 공격과 조롱을 받고 있는 상황에 대한 문맥을 보지 않는다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이라는 소재는 그 의미를 잃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 주일에 Lectionary 를 따라 이 시편 공과를 설교 주제로 선택한다면 시편 62편 전체를 설교할 것입니다. 4절이 추가된다고 해서 읽는게 그리 길어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이 시편은 팬데믹으로 인한 2020년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현재 미국에서는 정치적 불안이 우리의 안전감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 악인들의 손에 의해 고통받는 내용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아님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최근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 특히 2021년 1월 6일 미 의사당 난립 사건 이후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시편 62편의 첫 구절에 언급된 “흔들리는 울타리”와 “기울어지는 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기초가 흔들렸습니다. 소셜 미디어와 카메라를 향해 추악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고 지금도 쏟아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견고하고 피난처가 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시편 기자는 물론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 그리고 이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쏟아 부으라고 격려합니다. 그것이당연하지 않나요? 우리의 가장 깊은 두려움과 불안, 의심과 어두운 생각을 맡길 수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만한 참된 피난처로 삼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려면 하나님은 우리를 알아야 하고, 우리에게 신성한 피난처가 필요한이유가 무엇인지 들어야 합니다.
애통의 시편 정신에 따라, 여기서 우리는 고통스런 상황가운데 그냥 참고 삭이거나 거짓된 경건을 앞세워 깊은 갈망과 감정을부인하지 말아야 할 것을 권고 받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털어놓으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받아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공감 하신다는 것을 느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 주실 해답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신다는 말씀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우리가 자주 상기해야 할 실질적인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시편 기자는 9절과 10절에서 악하고 교만한사람들에 대한 최종 분석에서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허상. 전도서에서 무의미, 수증기, 허무함을 나타내는 후렴구로 사용되는 “숨”을 뜻하는 히브리어 ‘헤벨’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의 교만하고 거만한 사람들은 분명 멋진 쇼를 잘 합니다. 그들은 허풍장이들로 소음과 분노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휘황찬란하고 화려합니다. 헤드라인을 장악하고 계속 뉴스에 나옵니다. 그들은 부와 권력을 축적하고 거의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사람은 코캐인 2온스를 소지한 혐의로 15년 동안 감옥에 가지만, 어떤 사람은 거액의 사기나 범죄를 저지르고도 한순간의 후회도 없이 자신이 저지른 일의 합한 처벌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컨대, 그들은 강력하고 거대해 보입니다. 무시할 수 없는 힘과 그 모든 것들.
그러나 시편 기자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결국 그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닌것, 즉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니고 장기적으로나 영원의 시각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업적은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권세는 놀랍고 갑작스러운 종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10절에서 신중한 경고가 이어집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방법을 우리의 방법으로 채택하여 부나 권력을 얻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어지럽고 난장판 세상에서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실체가 전혀 없는 사람들로 분류되어파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체로 사악하지 않은 평범한 수단을 통해 부나 다른 재물을 갖게 되더라도 그것을 인생의 중심으로 삼지 마십시오. 우선 그러한 물질적인 것들은 흔히 말하듯 눈 깜짝 할 사이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오직 한 가지, 더 정확하게는 오직 한 분만이 여러분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여러분의 마음을 두어야 하며, 모든 것에 대한 이 시편의 대답은 바로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이 시편은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신약성경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하는 오늘날 복음 설교자들에게 고민거리가 될 수있는 한 줄로 끝납니다. 즉, 시편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각자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선언으로 끝납니다. 성경에서이러한 정서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시편뿐만은 아닌데 은혜만으로 구원받는 교리와 상충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맥락에서도 사실인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예수님의 완전한 의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면(사도 바울이 구원에 대해 가장 좋아하는 표현을 사용하자면), 남은 것은 우리 자신의 행위 뿐이며, 그렇게 되면 거룩하고 의로우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성취와 의의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물론, 이 시편이 주장하는 다른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인생의 요약으로 하나님께 제시 할 수 있는 것이 부당하게 얻은 재산과 업적뿐이라면 통과하지 못할 것은 당연하고 결국 훅 하고 사라질 공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인생의 어두운 계절에, 그리고 미국과 같이 많은 것이 불확실해 보이는 곳에서 어둡고 연약한순간에 시편 62편이 상기시켜 주는 것은 많은 절망과 상실의 시기에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우리를 안심시키고, 희망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 모든 상황을 진지하게 고려할 때, 이 말씀이 결코 가볍고 쉬운 답은 아닙니다. 하지만 믿음의 관점에서 볼 때이 말씀은 진리이며,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화 아이디어
다른 설교 주석에서도 비슷한 요지의 구절을 인용한 적이 있지만, 시편 62편 9절은 해리 포터 소설/영화 시리즈가 끝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처음부터 이름을 밝히지 말아야 할 사악한 볼드모트 경은 무섭기 그지없어 보였습니다. 그는 아마도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였고, 가장 사악하고 악랄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이야기 초반에 죽음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다시살아날 방법을 찾아내는 등 무적의 존재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영원히 살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해리 포터와의 마지막 전투에서 볼드모트는 갑자기 패배하고 맙니다. 일련의 사건을 통해 말 그대로 영혼이 조각난 볼드모트는 결국 아무것도 아닌, 한숨과 공기 한 줌에 불과했어요. 그래서 마지막 전투에서 볼드모트는 자신의 죽음의 저주가 자신에게 되돌아왔을 때 그냥 그의 몸 전체가 불에 탄 신문지 재처럼 바람에 흩날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대로 바람에 흩어져 사라져 버립니다. (이 장면은 여기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62편이 현재 우주의 주인이라고 착각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결국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드러날 것입니다; 불에 탄 종이의 재처럼 실체가 없는 존재로 말입니다.
시편 62:5-12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