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년간 칼빈 신학교에서는 매주 한 번씩 ‘공동체 성경 봉독(Public Reading of Scripture)’ 모임을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30분 동안 함께 모여 구약, 복음서, 그리고 시편을 몇 장씩 소리 내어 읽습니다. 얼마 전 한 학생이 시편 70편을 낭독한 적이 있습니다. 그 학생이 미리 본문을 읽고 생각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시편 70편 3절에 나오는 특이한 구절을 어떤 목소리 톤으로 읽어야 할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그 구절은 시인의 원수들이 그를 향해 “아하! 아하!” 하며 조롱하는 장면입니다. 한편으로는 이 시에서 이 조롱이 분명 극심한 고통의 원인이기 때문에 결코 우스꽝스럽게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평소에 쓰는 말과는 너무나 달라서, 이를 비웃는 소리로 표현해야 할지, 다스 베이더(Darth Vader)처럼 울려 퍼지는 음산하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해야 할지, 아니면 다분히 반어적인 톤으로 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이 구절의 여러 번역본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몇몇 번역본은 시인을 비방하는 자들의 말을 아예 인용하지 않는 쪽을 택해 “그들이 나를 비웃지 못하게 하소서”와 같은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번역본은 비교적 희귀한 히브리어 단어이자, 그 자체로 거의 ‘아하’처럼 들리는 ‘헤아흐(he-ach)’라는 단어를 반영하여 “아하! 아하!”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아하”가 이를 표현하는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어떤 번역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하”를 한 번만 쓰고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아하! 우리가 드디어 그를 잡았다!’라고 말하는 자들을 멈추어 주소서.”
아마도 그것이 이 탄식시의 정서를 표현하는 꽤 괜찮은 방법일 것입니다. 여기 묘사된 상황은 암울하고 절박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믿음을 조롱하고, 일평생 외쳐온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한낱 망상거리로 전락시키려는 자들에게 쫓기며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급기야 어떤 시점에서 이 냉소주의자들과 비판자들, 그리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마침내 시인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기고만장하여 이렇게 외쳐대는 듯합니다. “그것 봐라! 아하! 우리가 드디어 네가 답을 모르는 질문을 던졌구나! 이제 널 잡았다, 친구! 아하! 넌 꼼짝 못 해!”
물론, 대부분의 탄식시와 극심한 고통을 다룬 시들이 그렇듯, 여기에서 위험은 단지 심리적인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2절에서 시인은 원수들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 호소합니다. 그들이 정말 문자 그대로 그를 죽이고 싶어 하는 걸까요?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원수들이 그의 파멸을 꾀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말 그대로 목숨을 빼앗기는 것보다는 덜 심각해 보입니다. 어쩌면 이 모든 위협이 뒤섞여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시인을 죽이고 싶어 하거나, 적어도 그가 완전히 파멸하는 모습을 지켜봄으로써 그의 숨통을 끊어놓으려는 것입니다. 아니면 적어도 그가 섬기는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 ‘그런 하나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며 시인을 굴욕스럽게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게 어떤 방식이든, 그를 깎아내릴 수만 있다면 상관없을지도 모릅니다.
구체적인 정황이 어떠하든, 시편 70편은 매우 짧지만 지극히 간절한 구원의 부르짖음입니다. 시인은 원수들이 자신에게 하려는 짓(적어도 실제 목숨을 빼앗겠다는 최악의 위협)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대로 되갚아 달라고 구하지는 않습니다. 시편 70편에서 그가 원수들에게 바라는 최악의 저주는 기껏해야 “수치와 무안” 정도입니다. 다른 시편들은 분명 이보다 더 나아가 원수들에게 파멸, 혹은 신체적인 위해를 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들이 자신들이 틀렸음을 깨닫고 물러나거나, 그저 당혹감에 휩싸여 어리둥절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 일조차 오직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습니다. 시인은 “가난하고 궁핍하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개입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런 시편을 접할 때, 시인은 만약 하나님께서 정말로 자신을 위해 역사해 주신다면 그 구원이 어떤 모습일 것이라고 상상했을지 궁금해집니다. 도대체 무엇이 원수들을 부끄럽게 만들까요? 무엇이 그들을 당황하게 하고 혼란스럽게 만들까요? 만약 이 시인이 안식일에 시편 70편의 기도를 드린 후 바로 다음 수요일 오후에 신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요? 솔직히 우리는 알 길이 없고, 짐작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신원이 이루어지려면, “아하! 아하!” 하며 비웃던 무리를 시작으로 모든 사람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이 존재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이 이 시인의 편임을 부인할 수 없이 보여줄 거대한 기적이 필요할까요? 아니면 훨씬 더 조용한 방식으로도 충분할까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시인의 귀에 지극히 지혜로운 반박의 말을 속삭여 주셔서, 그 한마디에 그들이 입을 꾹 다문 체 신학적 논쟁의 완패를 인정하고 슬그머니 도망치게 만드는 것 말입니다. 아니면, 현재의 온갖 비난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는 그 어떤 것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인을 갈라놓을 수 없음을 알게 해주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따뜻한 담요처럼 시인을 조용히 감싸안아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할까요?
확실하게 단정 짓기는 어렵습니다. 아마도 그 중 어느 것이든 하나님의 신원하심을 드러내기에는 충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우리가 도움을 청하며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 우리 자신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치유를 위해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인 치료를 행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의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을 벼락같은 치유의 개입 대신에, 딱 맞는 치료법과 적절한 약물을 찾아내는 통찰력 있는 의사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냉소적인 비판자들의 말에 답할 수 있게 하심으로써 신원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침묵시키거나, 적어도 우리가 견고하고 합리적인 토대 위에 서 있음을 증명할 수 있을 만큼 탄탄하게 우리의 믿음을 변호할 수 있는 답을 주시기도 합니다.
반대로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암이 낫지 않고, 좋은 해답을 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시고 다시 일어설 힘을 주시며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우리는 참으로 이 모든 순간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토록 막아주시길 애원했던 비극이 결국 일어난 후에,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비로소 그 긴 호흡의 위로에 감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감사하게 됩니다.
시편 70편과 같은 시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때로 겪는 고통의 깊이뿐 아니라, 그러한 간구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다양한 방식을 모두 반영합니다.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삶의 어려운 질문들에 대한 답도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원은 때로 너무 늦어 보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이와 같은 시편을 설교하는 것은 강단에서 신앙의 고뇌와 아픔을 정직하게 마주할 소중한 기회가 되며, 이를 통해 상처 입은 회중에게 꼭 필요한 목회적 돌봄을 건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설교 속에서 성령께서 그 일이 일어나도록 도우실 때, 설교자는 그저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동유럽을 지배하던 시절,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여전히 자유를 위해 기도하러 교회를 찾던 애처로운 할머니들의 모습을 자주 비웃곤 했습니다. 사회주의 동독(DDR)의 오랜 지도자였던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는 자신과 그의 추종자들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으며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공공연히 큰소리쳤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에 일말의 진리도 없으므로, 기도의 힘 따위는 논할 가치조차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소련과 동독 정권은 무참히 무너져 내렸고, 1989년 11월 9일, 호네커가 21세기를 넘어 영원히 건재할 것이라고 장담했던 베를린 장벽은 말 그대로 산산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호네커가 완전히 패배하고 굴욕을 당한 채 사임하고 망명길에 올랐을 때, 기도하던 그 할머니들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들은 여전히 교회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독의 도시 라이프치히의 대로에는 거대한 현수막 하나가 내걸렸습니다. “Wir danken dir, Kirche” (교회여,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시편 70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