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0편 1–7, 17–19 주석

코멘트, 관찰, 그리고 질문

올해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시점에, 시편 80편은 우리가 보통 성탄절과 연관 짓는 따뜻한 장면들과는 전혀 다른, 매우 어두운 풍경 속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시편 80편을 읽다 보면—비록 Lectionary가 이 시편의 한가운데 있는 더 암울한 구절들을 건너뛰려 해도—이 시편이 파괴와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임을 놓칠 수 없습니다.

이 시편은 예루살렘과 성전이 바빌로니아인들에 의해 함락된 후, 이스라엘이 겪은 참상을 되돌아보는 탄원시입니다.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 벽난로 불소리가 은은하게 타오르고, 그 위에 정성스럽게 양말을 걸어놓은 채 드릴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전쟁의 폐허 한가운데서 드려진 기도입니다.

이 시편은 난민의 노래입니다. 유배자의 노래입니다. 2022년의 시점에서 말하자면, 우크라이나의 시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위 사진은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 직후, 키이우 시가지의 모습입니다.) 이 노래는 자신의 세상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사람이 미래에 대한 희망의 한 줄기를 간절히 찾으며 드리는 탄원입니다.

이 노래를 “고요한 밤”이나 “기쁘다 구주 오셨네” 같은 캐롤의 멜로디에 맞춰 부르지 마십시오. 이것은 승리의 노래가 아니라 패배자와 절망자, 위로받지 못한 자의 거친 울부짖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떠나버리신 것 같은 현실 속에서, 그분의 얼굴빛이 다시 비추기를 간구하는 절박한 기도입니다. 지금 그들은 너무나 어두운 곳에 있으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비출 빛이 거의, 혹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이 시편이 우리가 성탄절과 연관 짓는 따뜻하고 낭만적인 이미지—크리스마드카드나 화려한 장식들—과는 불협화음을 이루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시편의 탄원은 오히려 우리의 실제 세상에 더 잘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오늘날의 크리스마스 문화에는 어느 정도 인위적인 밝음과 억지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행복한 분위기를 “만들어내야만” 하는 듯한 압박을 느끼며, 12월 한달동안은 슬픔이나 어둠에 대해 말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하지만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진 못하더라도, 이 시기에 들리는 나쁜 소식은 왠지 평소보다 더아프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수년간 강해 설교 주석을 써오며 제가 자주 지적해온 것처럼, 미국에서 7월 4일 독립기념일 즈음에 누군가에게 슬픈 일이 생겼다고 해서 그 일로 “이번 독립기념일을 망쳤다” 또는 “앞으로도 잊지못할 상처를 남겼다”고 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즈음에 누군가에게 비극이 닥치면, 우리는 곧바로 “올해 그 가족의 크리스마스는 망쳤구나. 그 자녀들은 아마 평생 크리스마스이브를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로 기억하겠지.”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슬픈일이네. 크리스마스 망쳤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과연 슬픔이 크리스마스와 무관한 것일까요? 성육신의 의미—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사건—은 바로 이 세상의 슬픔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시편 80편을 채우는 난민과 유배자의 탄식이야말로, 오히려 성자의 탄생을 깊이 이해하게 하는 배경이 아닐까요?

시편 80편의 황량함은 성탄의 예외적인 분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성탄의 본래 배경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상실과 절망의 자리에서 다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성탄의 기적을 묵상하는 진짜 방식이 바로 이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실제로 난민이나 유배자는 아닐지라도, 영적으로 우리는 방황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 마음 깊은 곳에는 말할 수 없는 슬픔이 쌓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소서, 속량하소서, 주의 얼굴을 비추사 우리를 회복하소서.” 하나님께서 창조의 시작에 품으셨던 그 세상을 다시 보게 해 달라고.

시편 80편의 본래 상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성탄의 의미와 훨씬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은 또한 희망의 노래입니다. 모든 탄원시가 그러하듯, 이 기도는 세상의 잔해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는 믿음 위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귀를 닫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다시 우리를 향해 얼굴을 돌리시고, 그 얼굴빛을 우리 위에 비추실 것입니다.

실제로, 대강절(Advent)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결정적으로 한번으로 영구하게 행하신 때를 기념합니다. 빛으로 오신 그분, 세상의 빛이 육신이 되어 오셨습니다. 복음서 기자 요한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크리스마스뿐 아니라 모든 때에 묵상할 가치가 있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어둠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우리 위에 빛나는 하나님의 얼굴이 있음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빛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몇 해 전, 페이스북에서 한 이미지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저 정치적 풍자로 보였겠지만, 그 안에는 더 깊은 신학적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앞마당에 흔히 놓이는 성탄 구유 장면(nativity scene)을 조금 다르게 재현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상기시킵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오신 세상은 깨어지고 분열된 세상이었다는 것.

둘째, 거룩한 가족(요셉, 마리아, 아기 예수)은 실제로 난민 가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애굽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잠시 동안 유배자로 살았습니다. 그들이 철창 속에 갇힌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난민으로서의 연약함 가운데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이 한때 애굽에 있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상기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첫 마디가 “떠나라!”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르에서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땅도, 가축도, 풍요로운 삶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을 세우시는 첫 걸음은 그를 난민으로 부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생애 내내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사라가 죽었을 때조차, 아브라함은 가나안 사람들과 흥정을 해야 묘지를 살 수 있었습니다. 그가 소유한 땅은 아내를 묻을 무덤 한 기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께서 요셉과 마리아에게 다시 “떠나라!”고 하신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분은 유배자와 나그네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우리 역시 이 세상에서 집을 잃은 자들처럼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합니다. “주의 얼굴을 비추사, 우리를 당신의 집으로—곧 하나님 당신에게로—돌아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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