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1:17-27 주석

저는 이번 주일의 서신서 공과를 선포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합리적으로 자급자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믿습니다. 적어도 우리 중 일부는 탄탄한 가정에서 자랐고 평균 이상의 정규 교육을 받았습니다. 우리 중 다수는 편안한 생활 방식을 가능케하는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위치에 오르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현재의 삶의 지위를 적어도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야고보가 17절에서 주장한 것처럼 “모든 선하고 온전한 선물은 하늘에 계신 빛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진리를 온전히 실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합리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우리가 현재 위치를달성했다고 가정하는 것이 더 쉽고 자연스럽습니다.

게다가 우리 중 적어도 일부는 야고보서 1장을 상당히 “성공한” 삶을 사는 청중에게 선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회경제적 지위를 포함하여 삶의 모든 곳에서 온 사람들로 구성되지만, 이 주석의 독자들 중 적어도 일부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합니다. 또한 설교를 듣는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적어도 현재 자신의 위치에는 자신 스스로 도달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주일 서신서 공과의 선포자들은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에 대한 저항을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야고보 사도는 이번 주일 공과에서 주로 예수님의 친구들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여 신실하게 순종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묘사하는 선하고 완전한 선물은 하나님의 선하고 완전한 구원의 선물에 대한 신실한 응답의 필수적인 부분 인 경건과 거룩함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친구들의 경제적 자족감은 순종에 대한 “자급자족”의 감각으로 쉽게 넘어갑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다른이들을친절하게 대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기때문에 말보다 듣는 것이 더 빠르고 화를 더디 낸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존 칼빈은 하나님의 “이중 은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일차적으로 이중의 은혜, 즉그리스도의 흠이 없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으로써 심판자 대신 은혜로우신 아버지를 하늘에 모시게 되고, 둘째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룩하게 됨으로써 흠이 없고 순결한 삶을 가꿀 수 있게 된다”. 이번 주일에 교독문에서 지정한 서신서 공과는 바로그 “두 번째” 은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물론 야고보는 편지의 독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암시함으로써 모든 좋은 선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주장을 이끌어냄과 동시에, 적어도 불행이 그러한 완전한 의존감을 위협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2절에서 그는 성도들에게 “너희가 여러 가지 시련을당할 때마다 모든 것을 기쁨으로 여기라”고 권유합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또한 그러한 시련가운데 일어나는 유혹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유혹은 하나님의”선하고 온전한” 선물 중 하나가 아닙니다 (17). 그 대신 야고보가 여기서 주장하듯이 유혹은 억제되지 않은 “악한 욕망”의 산물입니다 (15).

야고보서 1장의 선포자들은 사도가 이 서신을 읽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사도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독자들을 “사랑하는 형제자매들”(19)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그가 고통받는 첫 번째 독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사도가 나중에 편지를 쓰는 사람들에게 거의 거친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그가 그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그들이 마음뿐아니라 순종으로 예수님을 따르기를 갈망하는 데서 비롯된 것일 수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번 주일에 지정한 교훈을 하나님께서 입양한 자녀들에게 주신 선물에는 하나님의 양자와 양녀를 구원하시려는하나님의 선택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고, 그분이 창조하신 모든 것의 첫 열매가 되게 하려고”(18) 선택하셨다고 선포합니다.

이는 성경의 이미지와 공명하는 신학적 풍요로움으로 가득 찬 야고보의 주장입니다. 그가 언급한 “거듭남”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라고 부르셨던 것을 연상시킵니다(요한복음 3:3-7). “첫 열매”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첫수확물, 즉 최고의 소산을 주님께 드리라는 하나님의 초대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입양된 아들딸들을 단지 구해 내시는 것 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은혜롭게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야고보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순종의 첫 세 가지 은사 목록에는 우리의 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서둘러 듣고, 말하고 화를 내는 속도를 늦추라고 주장합니다. 19절을 의역해서 “귀로 이끌고 혀로 뒤따르며 분노는 뒤에서 따라오게 하라”는 말씀도 기억에 남습니다.

이번 주일 서신서 공과의 선포자들은 왜 사도가 거룩함과 의로움이라는 하나님의 선한 선물에 대한 설명을 혀로 시작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심장이나 눈, 손이나 발로 시작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손과 발로 서로에게 주는 상처는 눈에 보이고 식별할 수 있지만, 혀로 서로에게 주는 상처는 눈에 잘 띄지 않고 훨씬 더 배신감을 주기 때문 아닐까요?

게다가 제 동료인 Stan Mast가 지적했듯이, 혀로 말하고 분노를 표현하는 데 모든 시간을 보내다 보면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진리의 말씀을 들을 시간도 능력도 없을 수 있습니다. 이는 시끄러운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특히 중요합니다. 수많은목소리와 소음이 우리의 관심과 애정을 얻기 위해 경쟁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러한 불협화음에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더하면 하나님의 진리 말씀의 완전한 아름다움을 들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사도는 26절에서 혀를 통제하는 것이 신앙 생활의 핵심이자 좋은 은사라고 언급할 정도로 혀를 통제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거기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중하고 지혜롭게 말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우리의 주장과 모순된다고주장합니다. 우리는 말하기에 너무 바빠서 취약한 사람들을 돌보고 종종 불의한 세상에서 정의를 행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운부르심을 듣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사도가 22절과 그 다음 구절에서 덧붙인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우리가 순종하는 대신에 우리의 경청에만 관심이 있으시다고 가정하는 자기 기만으로 쉽게 이어집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남은 생애 동안 영적인 신생아처럼 행동하도록 하나님의 입양된 자녀들에게 은혜롭게 중생을 주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의 마음에 순종하여 성장할 수 있도록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셨습니다.

사실 사도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도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다고 생생하게 지적합니다. 물론 의학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는 것을 누군가 치아 사이에 시금치 조각이 끼었다고 말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지적을 해도 그러한 당황스러운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는 듯이 돌아서서 하루 종일 돌아 다닙니다. 이빨에 시금치가 끼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려서 시금치를 뽑을 생각도 하지 못합니다.

물론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좋은 선물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습을 잊어버리는 것에대한 야고보의 메시지는 사람들의 우스꽝스러운 자연 상태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없다면 하나님의 사랑받는 가장 성숙한 사람들조차도 고집센 어린아이와 같이 선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순종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덕적 설교로 빠지기 쉬움도 경계해야합니다. 야고보서 1장의 선포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 중에는 고난 중에 있는 과부와 고아를 돌보고 세상에 오염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지키는 소망과 능력이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이 말씀에 대한 설교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멋진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시민들을 향한하나님의 깊은 열정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화 아이디어

Lee Sparks 와 Kathryn Hayes Sparks편집한 책 ‘설교의 기술에 관한 크래독’에서는 위대한 설교자 Fred Craddock의 말을 인용해 “성경은 경청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성경에서 ‘경청’이라는 용어는 ‘순종’으로 가장 자주 번역되는데, 마치 경청이순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거나 심지어 순종의 첫 단계를 구성하는 것처럼 번역됩니다. 성경은 ‘듣다’와 ‘순종하다’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경청은 기본이지만 실천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에게는 경청하지 않는 놀라운 메커니즘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지적합니다. 이사야 50장 4- 5절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에 관한 놀라운 구절, ‘아침마다 주께서 깨우쳐 주시고 가르침을 받는 자처럼내 귀를 깨워 듣게하시나이다. 주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셨고 저는 거역하지 않았나이다’라는 구절입니다. ‘주께서 내 귀를 열어

주셨다’는 표현입니다. 그냥 듣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듣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