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는 이번 주일 서신서 교훈을 “선생(didaskaloi)이 많이 되지 말라”(1절)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때 쯤 되면, 많은 교사들이 이 말에 동의할 것입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몇 주(또는 며칠) 지나면 가장 헌신적인 교사들마저 뇌 수술 의사 같은 더 쉬운 직업을 고려하는 상태가 되곤 합니다.
저도 오랜 기간 교사를 했던 사람입니다. 가르치는 일은 보람은 있지만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제 가족 중 많은 사람들이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는 야고보의 이 주장에 동의하리라 생각합니다.
가르치는 일의 부담과 관한 제가 아는 가장 흥미로운 교사 이야기 중 하나는 결혼한 두 교수에 관한 것입니다. 그들은 주말이 끝날 때 항상 수업에 대한 부담이 가중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주일 저녁에는 서로를 거스르는 어떤 말도 하지 않기로 합의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선생이 되지 않기를, 특히 이런 주일 저녁 상황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학교 교사들은 때때로 관리자와 학생과 학부모 사이에 있고, 그 모습은 마치 3면이 닫혀 있는 고통스러운 피구 게임 한 가운데 놓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새 학기가 시작되는 이번 주일에 교회가 교사들을 격려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결과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의아해 질 수도 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야고보 시대에 ‘교사’라는 직책은 명예로운 자리였고 탐나는 자리습니다. 당시 가르치는 일은 오늘날의 의사나 사회복지사가 하는 일과 비교될 정도였습니다. 실제로, 야고보 사도는, 적어도 많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다른 어떤 직업 못지않은 명성을 가진 직업을 열망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설교자와 교사들에게 “그런 유명한 일에 뛰어들려고 서두르지 말라”고 말합니다. 가르치는 일은 혀를 많이 사용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 몸의 모든 부분이 제어하기 어렵지만, 본문 2절에서 그는 특히 혀가 제어하기 어렵기로 악명이 높다라고 말합니다.
뒷마당이나 집안에서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을 ‘제어’하는 사람들의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몇몇 담대한 사람들은 호랑이나 울버린과 같은 야생 동물을 길들이려는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혀를 통제하는 것은 햄스터를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백상어를 제어하는 것 같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혀는 본능적으로 거칠 뿐만 아니라 위험하고 강력합니다. 야고보는 혀를 거대한 산불을 일으키는 불꽃에 비교합니다. 우리의 혀는, 비유적으로 말하면, 북미 서부 일부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쫓아내는 일종의 산불과 같은 재앙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번개 한 번이 칠 때 20건 정도 되는 산불과 덤불 화재가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누군가 내뱉는 번개 때문에 20건 정도 되는 화재가 발생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피해를 일으킨 적은 있습니다. 저는 친구가 너무 간절했습니다. 그래서 미식축구 경기장에서 같은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근처를 서성 거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Ray라는 반 친구가 강력한 혀로 제 연약한 마음을 한 방에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는 길어진 제 다리에비해 너무 짧은 제 바지를 한 번 훔쳐 보더니 “Bratt은 홍수에 대비하고 있는 것 같은데~”라고 비웃었습니다.
야고보는 혀가 매우 강력해서 거대한 배를 조종할 수 있는 작은 방향타나 강력한 말을 좌우할 수 있는 작은 고삐와 같다고 말합니다. 둘 다 상대적으로 작지만 훨씬 더 큰 것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방식으로, 야고보는, 우리의 혀는 가장 작은 근육에 속하지만 우리의 삶 전체를 좌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우리의 혀가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야고보서 2장의 설교자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만약 제가 마라톤을 할 수 있다고 자랑한다면, 실제로 마라톤을 해서 제가 했던 자랑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훈련하고 식습관을 바꾸면서 제 삶 전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또는 혀를 격려하는 일에 사용함으로 어떻게 우정을 쌓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는 용서의 말 한마디가 화해를 통해 우리에게 상처 입힌 사람들과 화해를 통해 어떻게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보시고, 혀를 부드럽게 사용함으로 축 늘어지고 깨어진 영혼들을 어떻게 북돋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 3장을 읽을 때마다 저는, 제 전 동료이자 멘토였던 Bill을 떠올립니다. 그는 “황금 혀를 가진 웅변가”라 불릴 정도로 훌륭한 설교자였습니다. 또한, 그는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용기를 주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항상 사람들을 세워주기 위해 자신의 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방법을 찾았습니다.
반대로, 우리의 혀가 어떻게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는 지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짜증 섞인 말이 어떻게 우정을 망칠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보시고, 비판적인 말이 연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보시고, 험담 한 마디가 어떻게 명성을 파괴할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목회 초기에 제가 섬기던 교회의 교인이었던 한 소년을 AC라고 부르겠습니다.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그가 다가오자 저는 농담 삼아 “골치거리가 오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했을 때 저는 AC가 상당히 큰 곤경에 처해 있었던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제 ‘혀’가 그의 부정적인 자아에 불을 지폈고, 더 나아가, 그의 부모님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야고보는 이번 주일 서신서 본문에서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방식으로 우리의 혀가 우리의 삶에 불을 지필 수 있다고 덧붙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혀가 재앙을 일으킬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혀는 우정 관계와 가족 관계를 불태울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혀에게 그런 힘을 주면 그 힘이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칠고 강력한 혀라는 쉬지 않는 이 짐승을 누가 길들일 수 있을까요? 야고보는 말합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8절) 신학자 Augustine은 야고보가 이 말을 한 것은 오직 하나님만 혀라는 거칠고 강력한 동물을 길들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악한 자를 섬깁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사람들도 때때로 악한 자와 주님을 동시에 섬기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컨데, 혀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에 대해 험담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찬양하려는 유혹과 싸우게 됩니다. 무화과나무가 올리브를 재배하지 않지만, 혀는 때때로 이웃에 대한 거짓말과 주님께 대한 기도의 열매를 함께 재배합니다.
야고보서 3장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경건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격려의 방법을 찾고자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고 서로를 축복하는 데만 우리의 혀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님께 그리고 서로에게 고백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싶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사역에 의도적으로 마음을 열어 계속해서 우리의 혀를 선한 일에 사용하는사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역시 의도적으로 서로를 비판하는 일을 줄이고 서로를 세워주는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혀를 많이 사용하도록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신실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설교자와 교사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그러한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정치 지도자였던 우리의 위대한 ‘교사들’ 중 일부는 날카로운 혀를 무자비하게 사용했습니다. Lyndon Baines Johnson 대통령도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
‘The Years of Lyndon Johnson: Means of Ascent’라는 책에서 Robert Caro는 Johnson 대통령이 ‘부하 직원들’을 학대하고 아내에게 명령을 내리는 비열한 사람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자신의 성공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보도하지 않는 기자들을 맹렬히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기자들이 자신에 대한 비판을 암시할 때마다 말로써 그들을 찢어버렸습니다.
Caro는 Johnson 대통령이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드러내면서 그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아무 이유 없이 그들을 조롱하기도 했다”라고 말합니다. Caro가 “뚱뚱하고 키가작은 예민하고 다정한 남자”라고 부르는 AP 통신 기자인 Dave Cheavens를 Johnson 대통령이 조롱한 적도 있습니다. Cheavens는 쟁기질한 밭을 가로질러 가던 Johnson 대통령 뒤에 떨어졌습니다. 대통령은 그에게 “어서~ Cheavens, 그 작고 뚱뚱한 다리로 더 빨리 갈 수는 없겠지?”라고 그를 비웃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Johnson 대통령은 강력한 혀로 미 의회 의원들에게 1965년 투표권법 통과를 도와달라고 달콤한 말을 건네기도 했습니다. 이 법안은 연방과 주와 지방 선거에서 흑인의 투표권을 박탈하기 위해 고안된 제한이 불법이라고 규정했습니다. Johnson 대통령의 능숙하고 설득력 있는 언변이 아니었다면, 미국의 인종 관계는 분명히 지금보다 더 나빠졌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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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3:1-12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