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그리스도께서 둘을 하나로 만드신 것보다 더 반문화적인 그러나 희망적인 말을 할 수 있을까요?(14절) 우리는 수많은 구분선을 따라 깊게 분열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단선들이 만들어내는 격차는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자 대 공화주의자. 자유당 당원 대 보수당 당원. 백신 접종자 대 백신 반대자. 마스크를 쓴 사람 대 마스크를 거부한 사람. 다양한 인종을 지지하는 사람 대 그렇지 않은 사람. 결혼, 성별, 성적 지향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지지하는 자 대 보다 진보적인 이해를 지지하는 자.
목록은 끝없이 이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더 이상 바울이 말했던 “둘”(14절)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친구들조차 이제 거의 무한한 “입장들”을 취합니다. 에베소서 2장 설교자들은 청중들과 함께 이러한 깊은 분열의 증거들을 살펴 보려 할 것입니다. 늘 그렇듯이 지역적 사례들만 아니라, 세계적인 사례들을 사용하도록 주의를 기울이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2장의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신 하나되게 하신 것에 대한 주장이 반문화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간절한 희망이기도 합니다. “둘”이 “하나” 되는 비전은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 대부분이 갈망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이번 주일 서신서를 통한 교훈은 예수님의 친구와 제자들에게 덥고 습한 날의 시원한 물 한 잔이나 아이스티나 또는 음료와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 서신서를 통해 주신 교훈의 “둘이 하나 된” 이미지를 청중에게 전달하려면, 설교자는 바울이 그 근거로 삼고 있는 그 토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바울은 인간적인 사업을 통해 영속적인 일치를 이루겠다는 환상을 품지 않습니다. 일치를 위한 인간적인 노력은 왔다가 사라지고, 성공하는가 하면 실패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13절에서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신 일치는 그것을 이루려는 인간적인 수많은 노력처럼 사라지거나 약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의견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치를 이룰 수 있는 도구를 사람들에게 은혜로 주셨습니다. 겸손과 무조건적인 사랑과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는 더 깊은 일치를 위한 견고한 구성 요소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의 일치와 화해에 대한 우리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에 가장 깊고도 최종적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이방인 친구들이 전에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의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12절)라고 슬퍼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본질적으로 서로에게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소외 된 존재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자연스럽게 완벽하게 그 소외에 대해 만족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 포함하셨지만, 이번 주일 서신서 교훈은 원래 그 약속을 받아들인 사람들 대부분이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의 민족적 정체성이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에 접근하는 것을 대부분 금지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희망도 없었고 하나님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21세기의 일부 경험들이 보여주는 암울한 그림입니다. 절망이란 병은 어쩌면 COVID-19보다 훨씬 더 전염성이 강할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이들도 이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바울은 이러한 전염병이 특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 만연해 있다고 주장하는 듯 합니다.
에베소서 2장 11~22절 설교자들은 이러한 절망의 예를 찾기 위해 책이나 미디어 매체를 샅샅이 뒤져 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삶에서 절망이 어떤 식으로 혼란을 일으키는지 조심스럽게 예를 들면서 공유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13절에서 “그러나 지금은”(nyni de)이라고 말합니다. 독자들은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좌석 가장자리로 몸을 밀어 놓은 채 앞으로 기울입니다. 이 구절은, 결국, 복음의 소망을 보여주는 번쩍이는 밝은 신호와 같습니다. 이 소망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열정적으로 사랑하신 세상에서 은혜롭게 작동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알리는 진입로입니다.
바울은 이 서신서 교훈을 소외된 사람들 사이에서 화해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인상적인 이미지로 가득 채웁니다.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 가까워졌느니라”(13절). 하나님으로부터만 아니라 서로에게서 멀리 떨어져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이미지입니다.
14절에서 사도는 “중간에 막힌 담”을 은혜롭게 허무시는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덧붙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 저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백성의 일치를 가로막는 모든 장벽을 망치로 쳐서 우리가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 사이에 열심히 쌓아 올린 벽을 부수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결과적으로 바울은 이어지는 19절에서 우리는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고아와 나그네와 원수를 하나님 나라의 가족의 일원으로 은혜롭게 입양하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번 주일 서신서 교훈 중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건물 이미지입니다. 20절에서 예수님의 친구들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사역과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몸이신 건물 위에 세워집니다. 사도는 그리스도가 그 건물의 초석이라고 덧붙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더해지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을 초석으로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구성된 온 건물이 하나로 결합되어 “주 안에서 성전”(21절)이 되어 갑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친구들을 하나님의 영으로 은혜롭게 거하시는 성전인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벽돌’로 삼으셨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이미지입니다.
집이나 다른 구조물을 짓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어린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도 드물 것입니다. 제 손자 중 하나는 건축업자들이근처에 새 학교 건물을 짓는 모습을 보는 것을 특히 좋아합니다. 거대한 크레인, 불도저, 굴착기 및 기타 건설 장비는 그에게 끝없는 매혹의 원천입니다.
에베소서 2장을 통해 하나님을 교회라는 건축 프로젝트에 사용되는 크레인이나 굴착기의 작업자로 생각해 보는 것은 너무 지나친 억측일까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인 “건물”을 짓기 위해 단 며칠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은혜롭게 일하신 방식에 대해 어린아이처럼 기뻐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건축 자재들을 하나님의 자녀 된 이들로 상상해 보는 것이 너무 지나친 것은 아닐까요? 벽돌과 다른 재료들을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 민주주의자와 공화주의자, 마스크를 쓰는 사람과 마스크를 거부하는 사람들, 곧 예수님의 친구라고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떤가요?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사용하시는 벽돌로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에베소서 2장 설교자들은 “건축 프로젝트”의 여러 면으로 청중들의 주의를 환기시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19절-22절의 모든 동사 시제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하나님의 건축 프로젝트가 아직 끝나지 않았고 현재 진행 중인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구성 요소인 예수님의 친구들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인내할 수 있고, 또한 실제로, 인내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 건축을 누가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친구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절)라고 했습니다. 사도는 우리 자신을 건축하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이 그분의 영으로 거하시는 거처가 되기 위해 함께 지어지고 있다“(이탤릭체 추가)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몸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건축 프로젝트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건축가와 현장 감독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교회 건축의 일원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이들은 우리 자신과 교회가 위험에 처할 때 이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예화 아이디어
이번 주일 서신서 교훈은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온 세상 사람들에게 코카 콜라를 사주고 싶어요. 정말로요.”라고 노래하는 코카콜라의 오랜 광고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음료를 마셔 대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이 세례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근 칼빈대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한 동영상이 그리스도의 영이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 되게 하는 방식을 훨씬 더 정확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그 안에 Calvin Prison Initiative Prison Choir가 함께 “Amazing Grace“를 부르는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영상 자체는, 광고 후, 약 4분 길이입니다.) 하지만, 주의하십시오. 이 영상을 보고 들으면 예수님 친구들의 알레르기가 심해질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11-22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