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62장의 첫 구절은 희망과 거친 풍요로움으로 분출하는 간헐천과 같습니다. 이는 마치 색과 빛이 하늘을 가득 채우며 끝없는 웅장한 피날레를 장식하는 예언의 불꽃놀이와 같아서, 이 광경을 보는 사람들로부터 “우와”와 “아하”라는 감탄사를 연이어이끌어냅니다. 이 구절은 기쁨의 약속과 이미지로 가득 찬 구절 중 하나로, 아무리 과장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말로 표현이거의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여호와는 황량하고 황폐하고 혼란스럽고 오랫동안 이방 포로로 잡혀 있던 자신의 백성이 곧 모든 면에서 변화될 것이라고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찬란한 면류관으로, 너무나 찬란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로 변하여 신성한 영광의빛을 백만 방향으로 한꺼번에 굴절시킬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나타내실 수 있는 모든 신성한 기쁨의 과녁, 즉 정중앙의 과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머니가 자식에게 모든 사랑을 쏟아 붓는 것처럼 이 백성에게 사랑과 열정을 쏟아 부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땅 자체도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땅이 일종의 결혼 관계를 맺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상한 이미지지만 인상적입니다!). 사람들처럼 땅도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의 손길에 반응할 것입니다. 땅은 번성하고 생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풍성하게 생산할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 풍요로이 넘쳐 흐르는 샘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사람들이 빛나고, 땅이 빛나고, 온 세상이 빛나는 이미지의 집합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빛이 이 모든 것에서 반사되고 있기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과 온 피조물에게 따뜻하고 놀라운 빛을 비추실 것이며, 그 빛은 햇빛이 농작물을 자라게하는 것처럼 놀라운 성장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여 다시 발산될 것입니다.
올해 Lectionary 에 이 구절은 요한복음 2장의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와 짝을 이루는데, 그 이유를 알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 또한 놀라운 풍요의 이야기입니다. 요한이 말하는 예수님의 ‘영광’은 갈릴리 가나에서 처음으로 드러나는데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어떤 기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날 예수께서 엄청난 양의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사실 (그리고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맛본 최고의 포도주)에서 비롯된 것이었죠. 물론 예수님이 그 작은 결혼식에서 사회적 문제를 고치신 것은 이사야62장이 말하는 더 큰 규모의 풍요의 축소판이었지만, 두 구절은 분명히 같은 방향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그 길은 “번영”이라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물과 그 창조물 안에 있는 그의 백성이 번성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쁨이 사람에게 임할 때그 번영도 함께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그의 피조물을 기뻐하시며,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그토록 명백한 기쁨을 취할 때 또 다른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한마디로 샬롬의 초상화입니다. 그리고 우리 중 누구도 그토록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는 그림에 면역이 될 정도로 금욕적이고 탈세상적인 위선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주의할 점도 있습니다. 결국 이사야 62장은 오늘날 “번영의 복음”이라고 불리는 “건강과 부”를 주창하는 사람들이 너무쉽게 붙잡을 수 있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조엘 오스틴과 다른 많은 사람들이 약속하듯이, 하나님과 잘 지내면 지금 최고의 삶을살 수 있고,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입니다. (보석상에서 구매한 진짜 다이아몬드로) 빛나는 화려함의 왕관이 되고, (햇빛이 반사되 반짝이는 고급 승용차 처럼) 영광스런 면류관 이 되고, 하나님의 기쁨이 당신의 주거 공간을 방 2개짜리 집에서 경사진 판넬과 대리석 바닥이 있는 백평 짜리 저택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모든것이 이사야 62장의 진정한 의미라고. 이것이 우리가 기대해야 할 모습이 아니냐고 말이죠.
최근 교인들에게 하나님은 우리가 최고를 갖기를 원하시니 목사도 포르쉐를 타면 안 되겠냐고 말하기 위해 실제로 새 포르쉐를몰고 교회당으로 왔다는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하나님 백성의 번영에 대한 비전이 있으며, 분명히그러한 종류의 비전은 언젠가 우리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새 창조 세계”가 이루어 질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복음과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의 균형에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는 그 비전을 누리거나 우리 자신의둥지를 채우기 위해 그 비전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의 새 질서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여전히 이기적이고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을 포기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소외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도록 선지자들의 부름을 받았으며, 바로 그러한 가난하고 소외된사람들의 등에 기대어 자신의 부를 쌓는 사람들에게는 큰 화가 내려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요한복음 2장이 보여주고 이사야 62장이 예언한 것처럼,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가는 곳에는 풍요가 있고 치유가 있으며 생명의 번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더 큰 모범이나 성경의 더 넓은 증거를고려하지 않고 이기적으로 추구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요한복음 2장과 이사야 62장에서 볼 수 있는 찬란한 광채와 극도로 풍성한 좋은 것들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갈망합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 빛나는 현실에서 우리보다 훨씬 더 멀리 떨어져사는 이 세상 다른 사람들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그러한 것들을 바랄 수 없습니다.
“지금 통곡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떠올리며 Lewis Smedes는 지금은 그리고 그의 나라가 완전히 임할 때까지는 아파하는 마음만이 기쁨도 느낄 권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가진 것이 적은 사람들을 위해 울고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것에 대해 기뻐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사야 62장 같은 구절을 우리 자신의 작은 자아에게만 적용한다면, 은혜로 다시 태어나는 세상을 꿈꾸는 참으로 서정적인 구절을 결국 악몽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회고록 <이 떡을 취하라> 에서 Sarah Miles는 어느 일요일 아침 우연히 들어간 샌프란시스코 성공회 교회에서 성찬의 떡을 먹는 단순한 행위를 통해 철저하게 세속적인 삶이 예수님께 헌신하는 삶으로 변화되는 순간을 맞이합니다. Miles는 애초에 무엇이 그녀를 성찬식 테이블에 나아가게 했는지 알지 못했고, 단순한 빵 한 조각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떡이그녀의 입에 들어가자마자 예수님이 그녀의 마음과 정신을 가득 채우셨습니다. 알고 보니 그 떡은 목사들의 주장대로 ‘생명의떡’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떡은 그녀에게 지금까지 없었던 방식으로 그녀의 굶주림을 채웠습니다.
그러나 Miles에게 그것은 단지 성찬식에서 예수님의 살을 먹음으로써 자신의 마음에 새롭고 풍성한 영적 생명을 얻은 경험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 경험을 주변에 전파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일련의 급식 배분소를 설립하여 다른 사람들을 먹이는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전환했습니다. Miles는 콩 통조림, 밀빵, 바나나 다발이 놓인 급식 배분소의 테이블과 성찬식 테이블을 구별할 수 있지만, 결국에는 그 테이블들도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먹이십니다. 우리는 서로를 먹여 살립니다. 그리고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생명의 춤에서 결국 모든 것이 같은 것, 즉 풍요로운 생명으로 귀결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사야 62:1-5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