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4:34-38, 42-49, 56-67 주석

우리가 이삭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는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 의해 제단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창세기 22장). 몇 년이 지났습니다. 아브라함이 헷 족속으로부터 구입한 무덤에 그의 아내 사라를 묻었습니다(창세기 23장). 그에게 아직 할 일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이삭은 40세이고 미혼이었으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하신 모든 언약적 약속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종을 보내 이삭의 신부감을 찾게 합니다.

이 이름 없는 종이 행하기에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근처 헷 족속으로부터 신부감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이 이교도들과 섞이는 일은 허락하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종은 아브라함이 불가능한 미션[“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창세기 24:4)”]을 위해 떠났던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가나안 남부 지역에서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으로 가는 여행길에 오릅니다. 큰 건초 더미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은 일이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보게 되겠지만, 이것이 이 이야기의 요점입니다.

우리의 본문은 곧 이삭의 아내가 될 리브가의 운명적인 만남을 생략하고, 나홀의 고향 아브람 나하라임(Aram Naharaim)에 이르는 여정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여정을 통해 그리고 종이 라반과 다른 가족들을 만났던 장면을 통해 교훈을 얻습니다. 그는 음식을 먹기 전에 그 모든 이야기와 요청을 말해야 했습니다.

나는 종의 말을 반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간단히 묻겠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설교해야 할까요? 이 이야기는 무엇에 관한 것입니까? 우리는 어느 부분에 주의를 집중합니까? 여러 가능성이 있습니다: 종, 리브가, 라반, 아니면 하나님 등, 선택지는 다양합니다.

한 설교자는 종의 섬김의 모델에 대해, 곧 그 종의 경건한 성품과 지혜, 표적을 구하는 기도와 라헬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 주인에 대한 헌신과 사명에 초점을 두고 설교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에 대한 그 종의 헌신은 봉사의 위치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도전이며 위안입니다.

또는 누군가 “경건한 아내를 찾는 방법”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설교는 이 모든 중요한 여정 중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찾고 있는 많은 독실한 젊은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본문은 양털을 한번 깔아보도록, 즉 “바로 그 사람”을 찾는 특별한 징표를 구하는 일을 격려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 남녀에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헷 족속 가운데서 배우자를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 가운데서 배우자를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설교는 라헬에게 초점을 맞출 수도 있습니다. 남을 돕고자 하는 그녀의 심성, 그녀의 담대함과 근면함, 그리고 어떤 여성도 가본 적이 없는 곳으로 기꺼이 가고자 하는 그녀의 의지에 집중해서 말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라헬도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신랑을 만나기 위해 모르는 남자와 함께 기꺼이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납니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대단한 여인입니다! 그녀를 오늘날 강력한 페미니스트들의 선구자로, 자존심 강한 독립적인 여성의 모델로 사용할 수 있는 합당한 방법도 있습니다. 그녀는 헐값에 넘기거나 공짜로 나누어 주는 노예가 아닙니다. 그녀는 선택권이 있었습니다. 열흘 동안 여기 더 머물면서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할 것인가? 아니면 그 종이 제안하고 있는 바와 같이 당장 떠나겠는가? “이 남자를 따라 가겠습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간단한 대답은 엄청난 도전에 대해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누가복음 1:38)라는 유명한 말로 답했던 또 다른 젊은 여인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라헬의 가족들, 특히 멋 훗날 라헬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에게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될, 그 지역의 유력자 라반에 대해 설교할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가 시작될 때부터 그는 물질적인 것에 관심 있는 사람으로 제시됩니다. 황금 코걸이와 팔찌를 보고 그 종을 만나기 위해 제일 먼저 달려 나갔던 사람이 라반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을 미루려는 그의 성향은 그가 계획했던 열흘 간의 송별회를 통해 암시됩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들의 손아귀를 벗어나는 것에 대해 또는 라반처럼 되지 않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설교 전체를 할애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본문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의 저자가 정말로 이야기의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예를 강조하려고 했는지 물어야 합니다. 족장들의 이런 이야기들이 정말 도덕적 교훈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이스라엘과 우리에게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에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까? 창세기 안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을 인도하시고 보존하시고, 보호하시고, 공급하셨는지에 대한 이야기의 일부로 그들을 볼 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라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실제로, 종이 한 모든 말은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가 가족들에게 아브라함을 소개할 때,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시어”라고 말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그 여행에 대해 지시한 내용을 보고하면서 아브라함이 “여호와께서 그의 사자를 너와 함께 보내어 네게 평탄한 길을 주시리니”라는 말로 자신을 보냈다고 말합니다. 그가 라헬과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내가 오늘 우물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만일 내가 행하는 길에 형통함을 주실진대” 그런 다음 그는 어떤 소녀가 바로 그 사람인지 하나님께서 그에게 확실한 사인들을 주실 것을 제안합니다. “그 여자는 여호와께서 내 주인의 아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신 자가 되리이다” 그가 기도한 대로 되었을 때,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사 .. 그에게 경배하고 찬송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라반과 브두엘은 이 모든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

이 이야기는 섬김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인도하심이나 결혼이나 여자다움에 대한 것도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세상에 주실 언약적 축복에 대한 그분의 준비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구속의 역사이며, 예수님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여호와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 안에 있었다는 것 없이 이 모든 계획은 불가능한 임무였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이 모든 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누가복음 1:37)

여러분의 설교에서, 이 임무의 불가능한 본질, 성공 가능성의 희박함, 그 안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역할,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언약의 역사와 구속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부인지를 강조하십시오. 원하는 모든 세부 사항을 사용하되, 길을 잃지 마십시오. 복음의 요점을 밝히기 위해 그 모든 것들을 사용하십시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함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이 모든 것의 결론이며, 증거이며, 보증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나는 끔찍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가운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스라엘과 세상의 소망이요 도움이 되시는 그 분을 바라보게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내일 당장 이 무서운 질병을 멈추게 하실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일 일은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사는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보이는 순간 및 시간들 속에서도 당신의 백성을 구속하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가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