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브엘세바에 있는 집에 앉아 있는 에서라면 부당하게 처한 내 상황이 화가 날 겁니다. 나는 속고 강탈당했습니다. 내 인생은 내 동생의 속임수로 인해 영원히 바뀌었습니다. 내 장자권이 사라졌습니다. 나의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눈먼 늙은 아버지와 나보다 동생을 더 사랑하는 어머니와 함께 이곳에 남겨졌습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꼬마 도둑을 죽일 텐데. 그러나 그는 이미 오래전에 라반 삼촌에게로 도망갔습니다. 그는 그렇게 도망 쳤습니다. 그는 내 인생을 망쳤고 그렇게 도망쳤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야곱이 아버지를 속인 뒤에도 좋은 조건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 모든 불의를 믿을 수 없습니다.
에서의 상황이 되어 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세상은 야곱이 행한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권력을 쥐고 있는 거짓말쟁이들, 절대 잡히지 않는 도둑들, 열심히 일하지 않았는데도 승진하는 교활한 동료들, 말썽꾸러기지만 교장실에 불려가지 않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수백 명을 죽인 후에도 보상을 즐기기 위해 몰래 빠져나가는 테러리스트들, 자녀들을 학대했는데도 아무도 그 사실을 예상하지 못한체 살아가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마땅히 받을 일들을 피해가는 약삭 빠른 악동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피해 나갑니다. 그러한 불의가 내뿜는 악취는 높은 하늘에까지 이릅니다.
하나님과 씨름한 사람의 이야기의 이 부분은 하늘이 악취를 맡고 에서가 오랫동안 미소를 짓게 만드는 방식으로 반응한다고 확신시켜 줍니다. 아시다시피 밧단아람에 있는 삼촌 라반의 집에서 야곱은 돌아올 것은 결국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삼촌 라반을 보면서 야곱은 나이가 더 많고 더 교묘하고 탐욕스러운 배가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작은 사기꾼이 교활한 회피자를 만나고, 도둑의 왕자가 왕을 만나고, 속이는 브엘세바 족제비가 하란의 권모술수로 무장한 수완 좋은 사람에게 패했습니다.
시작은 좋았습니다. 야곱은 라반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지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라반이 야곱을 환대한 이유를 수년 전 이삭이 아내를 찾으러 와서 리브가를 만났을 때 라반이 받은 호화로운 선물에 대한 기억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쨌든 야곱은 가족으로 받아들여지고 리브가와 사랑에 빠지고 라반의 목장에서 일하기 시작합니다. 라반은 심지어 그에게 돈을 지불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돈이 언급되는 순간 문제가 시작됩니다. 물론 야곱은 임금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빼앗은 장자권과 축복으로 보장된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는 아내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여기 있는 이유입니다. 제가 7년 동안 당신의 아름다운 작은 딸 라헬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그렇죠. 우리 모두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고 있으므로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야곱이 정확히 그가 브엘세바에서 한 일에 대한 대가로 하란에서 무엇을 돌려 받았는지를 강조할 것입니다. 속이는 사람은 속습니다.
눈 먼 늙은 아버지를 속인 이삭이 살았던 어둠을 이용하여 그의 매끄러운 피부를 염소 가죽으로 덮은 사람은 눈이 약한 레아를 두터운 베일로 덮어서 야곱이 그녀인 줄 모르게 하는 라반에게 속은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녀를 어둠 속에서 야곱의 침대로 밀어 넣습니다. “나는 당신의 큰 아들입니다”라고 말한 작은 아들 야곱은 작은 라헬을 원했을 때 큰 레아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장자의 이익을 훔친 도둑은 장녀의 부족함을 받게 됩니다.
야곱의 어머니는 에서보다 그를 더 사랑했고, 그녀의 일방적인 사랑은 야곱과 에서 사이의 갈등으로 이어져 지금도 중동 전역에 퍼져 있습니다. 야곱은 작은 딸을 더 사랑했고, 그의 불균형한 사랑은 라헬과 레아의 자녀들 사이에 수년간의 긴장을 초래하여 요셉을 애굽에서 노예로 팔게 만들었습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에서를 속여 빼앗은 축복은 야곱의 번영을 보장했지만 여기 하란에서는 라반이 야곱의 번영을 속여 빼앗거나 적어도 그렇게 시도합니다.
아마도 더 많은 유사점들과 그의 행동에 대한 더 많은 결과들이, 정확하게 시행된 정의를 보여줍니다. 준 만큼 돌려 받습니다. 또는 갈라디아서 6: 7에 “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육체를 거둘 것입니다. 그가 악을 심으면 악을 거둘 것입니다. 그가 거짓을 심으면 거짓을 거둘 것입니다. 그가 도둑질을 하면 그 결과를 거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틀림없이 에서를 웃게 만들 메시지입니다.
이 사실이 당신에게는 어떤 충격을 줍니까? 여러분의 교회에서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들릴리라 생각하십니까? 한 편에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외칠 것입니다. 극악무도한 사람들과 악당이 판치는 이 세상에서 정의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히틀러, 스탈린, 후세인, 연쇄 살인범, 다수의 강간범, 아동 학대자, 테러리스트, 최악의 적들과 나의 적들 모두가 궁극적으로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정확히 그리고 예약 없이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진정한 위로가 됩니다. “준 만큼 돌려 받는다”는 법칙이 예외 없이 정확하게 작동한다면 더 나은 세상, 선하고 도덕적이며 정의로운 세상이 될 것이라고 한 편에서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선한 힌두교도가 되는 일도 좋은 일입니다. 힌두교의 중심에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합당한 것을 얻는다는 카르마 교리가 있습니다. 실제로 인간의 삶은 모두 카르마의 결과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힌두교도는 환생을 믿습니다. 환생은 사람들이 한 번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입니다. 그들은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고, 매번 새로운 몸을 받고, 환생하고, 그들의 카라마가 다할 때까지 반복됩니다.
카르마의 수레바퀴가 돌기 때문에 한 생에서 당신은 부자가 될 수도 있고, 다음 생에서는 개, 다음 생에서는 가난한 여자, 다음 생에서는 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환생하는 삶의 수준은 당신이 전생에 무엇을 했는지, 당신의 카르마가 무엇인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절대적인 정의, 인생에서 작동하는 깨지지 않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 한 삶에서 당신이 하는 일과 다음 삶에서 당신에게 일어날 일 사이의 깨지지 않는 연결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정확히 얻습니다. 카르마의 수레바퀴는 준 만큼 돌려 받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야곱에 대해 에서처럼 생각하는 한 실망스러울 수 있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은 우리가 야곱임을 인식할 때 우리를
기쁘게 만듭니다. 예, 이 야곱의 이야기는 이 세상에 정의가 있고 세상의 야곱이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줍니다. 사실, 성경은 인간의 삶에 대해 매우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순환적인 일, 우리가 그것을 바로잡고 정의가 실현될 때까지 끝없는 환생, 원인과 결과의 끊어지지 않는 순환, 카르마의 수레바퀴가 아닙니다.
아닙니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시작과 끝이 있고 그 사이에는 여러 장들이 있는 이야기이며 시간과 공간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는 선입니다. 그리고 그 선은 중단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줄거리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자비로우십니다. 그분은 죄를 벌하실 뿐만 아니라 용서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우리와 우리의 후손에게 돌이키실 뿐만 아니라 그 죄를 독생자의 등에 지우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의 삶에서 자신의 속임수와 도둑질의 결과를 경험한 후에 결혼도 하게 되고 마침내 자녀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게 됩니다. “준 만큼 돌려 받는다”라는 제목의 그 장은 꽤 긴 장이지만, “구속사”라는 제목의 훨씬 더 긴 이야기의 한 장에 불과합니다. 다시 브엘세바로, 애굽으로, 다시 약속의 땅으로, 갈보리 언덕 위로, 지독한 죄를 지었지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를 얻은, 야곱과 같은 사람들로 가득 찬 하늘로 인도하는 이야기입니다.
에서와 같은 사람에게는 만족스러운 진리가, 야곱과 같은 사람에게는 위협적인 진리가 돌아옵니다. 나의 친구 에서야, 세상에 공의가 있음을 확신하라. 왜냐하면 이 세상은 공의로운 재판관이 다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속임을 당하고 파산했다면 안심하십시오. 오 야곱이여, 당신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으로부터 경고를 받으십시오. 무엇을 심든지 거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야기의 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5:20이 말하듯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원인과 결과의 비인격적인 힘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놀라움을 전문으로 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에 의해 통치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과 내가 기뻐할 수 있습니다. 만유의 심판자이신 그분은 또한 자비의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인생에서 야곱과 에서의 장에 있고, 당신이 야곱이라면, 심판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의 모든 성도들을 그들의 영원한 집으로 모으실 것이기 때문에, 당신은 영광스러운 희망 안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화 아이디어
위의 마지막 줄은 장엄한 찬송가 “기뻐하라 주님은 왕이시다”에서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이 곡은, 이 이야기의 감정적 힘을 강화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곡의 3연과 4연은 우리 이야기에 등장하는 양 극단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대적들이 굴복할 때까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그의 명령에 절하고 그의 발 아래 엎드려라.
마음을 열어라. 목소리를 높여라.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영광스러운 희망으로 기뻐하라. 심판자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모든 성도들을 그들의 영원한 집으로 모으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곧 천사장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팔이 울리니 기뻐하라.
밧단아람에서 하나님이 야곱을 다루신 것은 그를 벌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를 변화시키고 구세주를 세상에 데려올 이스라엘이 되도록 돕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속이는 마음은 속은 에서의 마음만큼 강퍅했습니다. 둘 다 은혜로 바뀌어야 했습니다. 큰 호평을 받은 영화 “A Beautiful Day in the Neighborhood”는 강인한 사람이 은혜로 변화되는 놀라운 예를 보여줍니다.
냉소적이고 화난 기자에게, 사랑받는 어린이 TV 쇼의 “Mister Rogers”에 대한 짧은 기사를 작성하라는 임무가 주어집니다. 기자는 못난 아버지에게 깊은 상처를 받아 폐쇄적이고 쓰라린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는 이터무니없이 친절하고 배려심이 많은 TV 인물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로 임무에 접근합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측면은 무엇일까요? 그는 정말로 어떤 사람일까요? 몇 번의 방문을 통해 그 기자는 아버지가 죽기 전에 아버지와 화해할 정도로 부드러워지고 치유됩니다.
이 이야기를 설교하기 전에, 그 영화를 보면서 야곱과 에서의 인간적 차원을 접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29:15-28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