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본문은 너무 가까이 느껴지기 때문에 오히려 설교하기 어렵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과 4장도 그런 본문 중 하나입니다. 이번 주일 서신서 본문을 읽으면서 사랑하는 Bill과 Carl, 그리고 Sharon과 Ashley(이 이름들은 실명이 아닙니다.)를 비롯한 수많은 다른 사람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솔직히 내가 이 본문에 대해 말하는 것들에 대해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하는 것조차 걱정됩니다.
바울이 이번 주일 서신서 본문에서 말한 “마음이 둔하고”(2:14), “가려져 있고”(2:15), “멸망하고 있는”(3:3) 사람들은 이방인불신자들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3장은 이러한 “불신자들”의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다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합니다.
고린도후서 3:13-15에서 그는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 말은 바울이 “마음이 둔하다”라고 한 사람들이 우리 교회와 우리 가족들의 가장 소중한 이웃 중 일부의 조상이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마음이 가려져 있다”라고 한 사람들 중에 우리 교회 식품 저장실에서 한 달에 두 번 굶주리는 이웃 3천여 명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데 관대하게 도움을 주고 있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바울이 “마음이 둔하다”라고 한 사람들은 단순하게 유대인들만 아닙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우리의 이웃들입니다. 사도는 아직 예수님 안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는 아직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지 못한 이웃과 동료들의 마음이 가려져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랑하신 사람들은 신학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우리 중 많은 이들에게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기도 한 이 신비한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직 예수님을 주님과 구세주로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바울의 설명에서 복음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어디일까요?
설교자들은 경멸보다는 연민으로, 거만함보다는 겸손함으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빛에 대해 마음이 둔한 사람들보다 우리가 더 똑똑하거나 더 낫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사람들은 우리와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깊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동료라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아직 공유하지 않은 사람만큼 선천적으로 둔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우리의 천성은 스스로를 예수님의 추종자가 아니라 그분의 원수라고 선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을 이웃이 아니라 원수로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 마음의 베일을 벗겨 주셨습니다. 우리가 덕스러운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는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할 때, 이번 주일 서신서 본문을 바울이 탄식했던 것처럼 누구나 “멸망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애도로 시작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마음이 가려진 사람들이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너무나도 간단하게, 영원한 행복을 위태롭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둔하다고 부르는 사람들이 Wheaties대신 Corn Flakes를 선택하거나 Toronto Maple Leafs대신 Montreal Canadiens를 선택하는 것과 다른 차원입니다. 그들은 생명으로 이끄는 길이 아니라 멸망으로 이끄는 길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눈멀게 한 것은 아니라고 재빨리 덧붙입니다. 고린도후서 4:4에서 그는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번 주일 서신서 본문을 의역한 Eugene Peterson의 메시지 성경은 불신자들의 믿음의 부족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듯 보입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4:4 말씀을 불신자들이 “잘못된 길을 바라보거나 그 길로 가고 있으며 그 길에 대해 진지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학자들의 일부 의견 차이는 주일 서신서 본문 중 “이 시대의 신”에 대한 언급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이 시대와 세상의 “신”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신”이 악마와 그와 연합한 자들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신을 탐욕, 물질주의, 인종차별주의, 또는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을 무너뜨리는 다른 악한 태도로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결과적으로, 이러한 신들은 그리스도인들조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의 가장 위대한 아름다움 중 일부에 대해 자연스럽게 눈을 멀게 합니다.
이번 주일 서신서 본문을 통해 바울은 악한 자와 그와 연합한 자들이 하나님이 창조하고 돌보시는 것에 대해 품고 있는 증오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과 다른 본문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빈 무덤에서 사탄과 죄와 죽음을 정복하셨을 때 사탄이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그 피조물에 대한 싸움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필사적인 싸움 없이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분리라는 영원한 멸망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 시대의 신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 산(acid)을 뿌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의 불신앙에 대해서만 아니라 그들을 영적으로 눈멀게 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위험한 세력에 대해서도 슬퍼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사람들은 그 신들의 성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영적으로 눈먼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들은 또한 영적으로 가려진 사람들과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공개적으로 기도할 방법을 찾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불신으로 인한 고통에서 그 불신의 어둠 안으로 복음의 빛을 선포하는 기쁨을 향해 빠르게 주의를 옮겨 갑니다. 그는 5절에서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계속해서 그의 독자들을 자신에게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께 향하게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무뎌 지거나 자신의 사역이나 자신 때문에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4:6 말씀에서 바울은 3장에 말한 빛의 이미지로 돌아갑니다. 성경의 첫 구절을 인용하면서 “‘어둠에서 빛을 비추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도는 분명하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어둠을 단지 물리적인 것이 아닌 영적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지식의 빛을 주시기 위해 우리 마음에 그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이 말은 토라를 읽으면서도 그 말씀을 믿지 않았던 유대인을 가리고 있던 고린도후서 3:15 말씀에 나오는 ‘휘장’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불신앙의 휘장을 은혜롭게 걷어내어 우리가 예수님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은 여전히 매우 신비롭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들의 마음은 둔해지고 어떤 사람들의 마음은 “뜨겁게” 되는 것에 대해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3장과 4장에 나오는 가려진 마음과 드러난 마음에 대한 묘사는 일부 설교자들이 선호하고 청중들이 듣고 싶어하는 종류의 설명과 다릅니다.
그 신비의 일부는 때때로 우리 이웃들이 보여 주는 놀랄만한 관대함과 관련이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의 영광을 위해 “마음이 무뎌졌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보다 굶주린 이웃들에게 더 관대합니다.
많은 유대인 이웃들이 눈에 잘 띄는 집안 어느 곳에 자선 모금함을 두고 있습니다. 그들이 tzedakah 상자에 넣는 돈은 자선을 위해 지정된 것입니다. 일부 정통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시작되기 직전 자선 상자에 돈을 넣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우리 교회 식품 저장실에 기부하는 것이 그 상자에서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제 아내의 마음의 베일을 은혜로 열어 주셨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상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수많은 은혜를 잘 관리하려는 청지기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이웃에게 관대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하나님을 본받는 일임을 상기시켜 주는 그런 상자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의 관대한 친절을 축소하려고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것을 영원한 생존을 위한 유일한 희망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게 관대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관대함에 대해 이야기한 유대인 친구들 중 어느 누구도 그들이 하나님의 “좋은 편”에 서기 위해 또는 그 편에 머물기 위해 가난한 이웃에게 관대하다는 것에 대해 암시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유대인의 자선 상자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놀라워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메시아로 보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뜨겁게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직 예수님의 친구가 아닌 일부 사람들의 큰 관대함은 예수님의 친구들이 회개해야 할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의 관대함을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만큼 충분히 본받지 못한 것을 고백하고 회개하도록 우리를 격려하는 것입니다.
참고: 이 설교 주석은 렉셔너리 본문을 넘어 이 구절들이 놓여 있는 맥락을 다루고 있습니다. 렉셔너리 본문에 초점을 맞춘 다른 주석은, 여기(https://cepreaching.org/commentary/2019-02-25/2-corinthians-312-42-2/)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예화 아이디어
이 설교 주석을 쓰고 있는 지금, 12명이 영하의 날씨에 교회 밖에서 농산물 상자를 포장하고 있습니다. 그 중 제 아내 한 사람만 기독교인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배고픈 이웃을 위한 기독교 사역을 구체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우리 교회에 온 유대인들입니다.
John Murray는 20세기 스코틀랜드 태생으로 많은 작품을 남긴 신학자이며 작가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작집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 구원의 관점에서 새로워지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과 타인의 보존, 현세적 행복, 문화적 진보,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향상을 촉진하는 많은 자질과 은사와 업적을 보여줄 수 있습니까? 복음의 구속적이고 재생적인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인종들과 민족들이 어떻게 우리가 인류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그토록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3:12-4:2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