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린 시절의 거의 대부분을 형제자매 중 하나와 침실을 공유했습니다. 또 성인이 되어서는 룸메이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느꼈던 좌절감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집안 일을 분담해야 하는데 자신의 몫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거나, 그다지 도움이 안 되거나, 다른 일에 너무나도 쉽게, 그리고 편리하게, 주의를 빼앗기는 사람이 하나씩 있는 듯 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이야기에 대한 본능적인 동정 같은 것은 제쳐 두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문에서 펼쳐지고 있는 실제 장면에 대한 우리의 주의가 산만해져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더 좋은 것”, 즉 필요한 “한 가지”를 선택했다고 하신 사람이 마리아였다 하더라도, 마르다가 느꼈던 좌절감은 사뭇 현실적이고 합리적입니다. 모든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마리아의 도움은 그 당시 그 지역의 문화적 가치와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의 도움이 있었다면, 마르다가 손님 곁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마르다가 동생을 공개적으로 꾸짖기 위해 예수님과 삼각 편대를 이루려 한 것은 그다지 합리적인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녀의 분노는 인간성의 일부였을 뿐이며, 그런 원초적인 감정의 폭발은 인간이 가지는 거대한 맹점이기도 합니다.
마르다의 맹점은 산만한 제자도의 증상입니다. 지난 몇 주에 걸쳐 살펴본 것처럼, 이 렉셔너리는 누가의 서사적 해설을 통해우리를 제자도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사실, 여러 주석가들과 마찬가지로, Justo González 역시 누가가 의도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와 마르다의 이야기를 “하나님 나라와 급진적 순종에 대한 예수님의 설교의 더 큰 맥락”의 일부로 묶어 놓았다고 주장합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촉발한 율법학자처럼, 마르다의 맹점은 순종이라는 요점을 놓쳤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마르다의 생각과 마음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이 있지만, 저는 그녀가 약간의 허영심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허영심이라는 죄악은 다른 죄악들과 달리 신앙과 종교적 실천이 전제되어야 저지를 수 있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어떤 것이 나쁜 것이 되기 위해서 좋은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허영심은 우리가 왜 그 일을 하는지에 집중하지 않고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에 집중할 때 생겨납니다. 이를 단순하게 신앙 생활을 겉모습으로만 행하는 사람들의 게으름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허영심은 우리가 선한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행하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고, 선한 행위를 자신의 잣대로 삼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자랑스러워하며, 자신의 섬김을 다른 사람의 섬김과 비교하면서 자신을 더 낫다고 여길 때 발생합니다. 마르다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허영심은 행위에 너무 정신이 팔려 행위 자체만 보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누가가 40절에서 “산만하다”(참고. 개역개정 ‘마음의 분주한지라’)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41절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다른 단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본문 요점’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르다는 많은 일 (신약성경 다른 곳에서 “봉사” 또는 “사역”으로 번역된 단어)로 인해 주의가 산만해져 있었습니다. 그리스어에서 “산만하다”는 말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초점이 옮겨질 때 일어나는 일, 즉 너무 바빠서 그 사람의 주의가 항상 이동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유일하게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것은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 뿐입니다. 중심 없는 활동은 초점을 산만하게 하고, 심지어 초점을 얇아지게 하거나 닳아지게 해서 진정한 목적을 이룰 수 없게 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습관은 우리의 삶에 나름의 틀을 만들고 행동 자체를 초점이 되게 합니다.
이것이 아마도 마르다가 마리아의 일하지 않음에 대해 불평한 이유일 것입니다. 그녀가 보기에 필요한 것은 오직 행동 뿐이었고, 따라서 그녀는 예수님께도 그것이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어쨌든, 마르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었습니다… 어쨌든, 이 모든 일을 시작했을 때 그녀의 의도는 옳았습니다… 어쨌든, 그녀는 예상되는 일, 더 나아가 필요한 일을 했습니다. 그녀는 (문자적으로, 예수님께 명령하기를) 여동생을 제지하라고 했습니다. 그녀의 허영심을 완전히 드러낸 것입니다.
마르다는 또한 우리가 질문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려고 할 때 하는 행동을 합니다. 물론, 이것은 조작된 전술입니다. 우리가 “너 신경 안 쓰고 있지???”라고 외칠 때, 그 상황에 대한 우리 자신의 판단이 드러납니다. 마르다는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나머지 주변 사람들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자신의 방식이 (곧 산만한 행동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불의의 희생자가 됐습니다.
마르다는 상황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산만함이 그녀를 잘못된 결론으로 이끌었습니다. 문제의 진정한 원인을 내면으로 깊이 들여다 보기보다 다른 누군가를 문제 삼는 외적인 해결책을 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그 점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먼저, 마르다가 산만함에서 벗어나게 하시려는 것처럼 사랑으로 응답하십니다. 그녀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시면서 진심으로 그녀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중 호격은, 문법적으로 볼 때, 그녀에 대한 감정적 고조를 암시합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 그 필요한 한 가지에 대해 상기시켜 주십니다. 마리아는 바로 그 것, 곧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에 대한 집중을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함으로써 마르다가 더 나은 것에 초점을 맞추도록 권하셨습니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에게서 멀어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필요한 일”인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스스로를 속이고 바쁘게 만드는 데 매우 능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기도 생활에 좀 더 정직하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산만한 제자도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Trevor Hudson 목사는 ‘Beyond Loneliness’라는 기도에 대한 책에서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목회 상담 중, 최근에 이혼한 한 여성이 결혼 생활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그것이 예수님이 신앙의 길로 제시한 제자도와 용서에 대한 부르심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너무나 화가 나서 진정한 용서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Hudson 목사는 그녀에게 성령께서 내면의 변화를 일으키도록 내버려 두라고 했습니다. 그 방법은 자신의 감정에 맞는 시편이 더 이상 맞지 않을 때까지, 다시 말해, 힘들어하는 원수와 분노에 관한 시편이 더 이상 전남편에게 해당되기를 원하거나 느끼지 않을 때까지 그 시편으로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고, 성령께서 그녀의 기도를 전남편을 위한 또는 전남편에 대한 기도로 바꾸어 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처음에는 중립적인 공간으로, 그리고 서서히 온전한 축복의 자리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실천이 없었다면, 이 여인은 자신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제자도에 집중하지 못하고 진정한 제자도에서 멀어졌을 것입니다. 또는, 사랑의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신앙이 아니라, 옳아 보이는 행동이나 말에만 집중하게 되었을 수도 있고, 좋은 일들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그 능력의 원천인 하나님의 임재와 단절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마르다처럼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행히도 그녀를 위해, 그리고 마르다를 위해, 주님은 기다려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받아 주시고 방향 전환을 일으키실 준비가 되어 있으셨고, 그렇게 일하고 계셨습니다.
본문 요점
예수님은 41절에서 마르다의 산만해진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 누가가 40절에서 묘사한 것과 다른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마르다가 여러 일로 지나치게 바빠 보였지만, 예수님은 그녀의 내면 상태가 그녀를 외적인 봉사에 집중하게 만들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녀의 걱정과 산만함이 봉사에 대한 불안감을 진정시키고 다시 집중하게 할 수 있게 하는 한 가지로부터 그녀를 멀어지게 했습니다. 조급한 영혼에게 필요한 한 가지는 주님의 발 앞에 앉아 말씀 집중하는 돌봄을 통해 다시 온전해 지게 하고 주의 깊은 제자도를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위 해설을 마무리하는 데 있어서 기도에 관한 이야기가 좋은 예시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킬만한 개인적인 일화를 하나 소개합니다:
저는 대학원으로 돌아왔고, 그 일환으로 매주 근무 시간이 다른 3개의 파트타임 일을 매주 최대 30시간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 지역 교회에서 10년 넘게 전임 사역을 했기 때문에 다양한 그리고 시간이 많이 소비되는 일을 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하는 시간은 전보다 줄었지만,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마르다가 그랬던 것처럼 어떤 일을 하면서 또 다른 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주의가 산만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 일이 저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제가 놓치고 있는 것에 대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몇 번이나 그렇게 했습니다). 몇 가지 결론에 도달했는데, 그 중 하나는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하셨던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한 가지는 무엇인가?’
학교 일을 포함한 저의 모든 사역의 초점은 종교적이고 봉사적인 일입니다. 하나 하나가 훌륭하고 의미 있는 일이지만, 저는이 모든 일을 제 소명이라는 한 가지와 연결시켜야 했습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더 높은 목적과 연결되어야 했고, 그 어떤 일도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저는 일 자체에서 벗어나 그 일의 목적 (진정한 목적)에 집중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주님의 발치에 앉아 성령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께서 제 인생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습니다. 산만함을 없애기 위해 저는 제가 이 일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새로운 방향을 설정해야 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산만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께 계속 집중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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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0:38-42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