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본문이 이번 여름에 많은 사람들에게 타격을 줄 것 같아 보입니다. 복음주의든 주류 교파든, 규모에 상관 없이, 총회의 결정으로 많은 교인들이 지금까지 알고 지내 왔던 유일한 신앙의 터전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불세례의 시작인가요?
예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라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한 (즉, 연약한) 종으로서가 아니라, 전사로서 “옳은 것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직설적으로 말하거나 또는 너무 많은 감정들을 고려하지 않은 체 말입니다. 우리의 지난 역사 속에는 칼을 휘두르는 신앙의 시대와 표현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들과 구별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축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악으로 가득 찬 세상과 선보다 악을 더 좋아하는 듯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 안에서, 하나님이 되신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목적과 그에 따른 감정적 고통을 극명하게 묘사하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미지에 따르면, 그가 가져오시는 불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속하지 않는 모든 것에 내리시는 심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만든 세상을 둘러보시면서 큰 슬픔과 스트레스를 경험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 때 가져올 최후의 심판이 이미 지금 이루어지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보다 더 새 하늘과 새 땅을 갈망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스도는 창조-타락-구속-완성/갱신이라는 긴 여정에 대해 알고 계시며, 하나님의 모든 행하심 뒤에 숨겨져 있는 동기인 사랑에 대해 알고 계십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세례를 받으실 때, 성육신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신 자신의 소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데서 잘 드러납니다. 그분에 의해, 그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통해 만물이 창조되었고, 온 세상이 화목하게 되었으며, 하늘과 땅의 갱신이 유일한 실재가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드러내십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자신에게 큰 스트레스라고, 문자 그대로 하면, 이러한 상황 때문에 자신이 괴롭다라고 고백하십니다. 마치 심한 열병이 계속되면서 온몸에 스트레스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보시는 것은 그분에게 큰 관심사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단순하게 다가올 일을 기다리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회개를 촉구하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평화의 왕자로서 분열의 근원이 되심으로써, 이미 불을 통해 정화하는 일을 시작하고 계십니다.
그의 마음에 대한 이 내밀한 그림은 무섭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합니다. 우주의 창조주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한 일로 인해 괴로워하실 수 있다는 사실에 경외감과 전율을 느낍니다.
하지만 동시에 교회의 일치와 평화를 지키려는 선한 노력이 그 목적을 달성할 때,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하나님께서 그 분열을 끝내실 것이라는 희망을 주십니다.
거짓 평화라는 수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희망은, 그 분열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결과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방식대로 행해질 때에만 비로소 생겨납니다. 분열이 만연되고 지속적으로 심화될 때, 분열이 어디에서 왜 일어나는지, 누가 혜택을 받고 누가 고통을 받는지, 누가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 사람인지에 대한 지혜와 분별력은 그것이 생명으로 이어질 수 있는 분리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평화의 왕자이신 그리스도는 위조품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습니다. 그분의 성육신하신 삶의 사역은 마땅히 그래야 할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고, 그렇게 되는 것을 방해하는 세력들을 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모든 분열은 종식 되겠지만, 그때까지, 거짓 평화를 요구하고, “전쟁”과 그 수단이 우리가 내리는 평화의 정의에 의해 정당화 된다고 믿고, 하나님의 사랑의 소망이 아닌 우리 자신의 의도에 따라 평화를 정의한 것들에 대해, 그가 회개를 촉구하는 칼을 휘두르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백성과 함께 하시며, 때로 분열의 선들을 그으십니다. 하지만 종종, 그 선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경계들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한 무리의 남자들이 간음 혐의로 한 여자를 데리고 왔을 때 모래 위에 분열의 선을 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 대신 ‘승리’의 길을 선택하라고 제안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시면서 분열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길가에서 죽어가는 유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부정한 이방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의의 분열을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핍박자 사울을 사도 바울 되게 하실 때 분열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분열을 일으키셔서 죄의 종노릇 하던 우리를 해방시키고 성령과 동행하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가져오시는 분열의 유형이 어떤 성격인지 물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 안에는, 다른 민족들과 구별되고, 나뉘는 방식으로,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의 성품이 상징적으로, 곧 거룩하고, 의로우시며, 세상의 유익을 위하시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분열 사역 안에, 생명과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분열 사역은 율법을 영으로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분열 사역은 사랑에서 비롯되며 언제나 앞으로 올 일에 대한 소망 안에 거합니다. 왜 우리는 거짓 평화에 안주하고 거짓 평화를 추구하는 것일까요?
본문 요점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분의 목적에 의해 공동체에 야기된 균열보다 하늘의 징조를 더 잘 읽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남풍이 더위를 가져오는 이유는 그것이 사막에서 불어 오기 때문입니다. 지중해에서 발원 된 서쪽에서 오는 구름은 그곳에서 비를 오게 할 가능성이 높은 습기를 모았습니다. 이는 호수효과 폭설(lake-effect snow; 호수의 물이 주변 기후에 영향을 주면서 더 많은 눈을 내리게 하는 현상)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치누크 바람이 어떻게 불어오는 지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리스도의 길에 온전히 동참할 수 없는 것일까요?
예화 아이디어
북미 기독 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올해 초, David Brooks는 New York Times Op-Ed에 “The Dissenters Trying to Save Evangelicalism from Itself”라는 제목의 기고문 습니다.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의 친구가 오늘날 신앙이 분열되고 있는 빈약한 지형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이야기합니다. 한때 “열린 광장”이었던 대화의 장이 지금은 “지뢰밭”입니다. 분열, 누구에 의한 것입니까? 분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한 세대가 다른 세대의 견해, 성경에 대한 이해, 신앙의 가치를 거부하는 가운데 가족의 실재는 분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Brooks는 복음의 진리를 상기시켜 줍니다. 상한 자에게서 해방이 올 수 있다는 그 진리 말입니다.
2000년대 후반, Phyllis Tickle은 ‘The Great Emergence‘에 관한 글을 쓰면서 유대 기독교의 구조와 관행이 성령의 영감으로 변화하면서 500년마다 도전과 격변에 대응하여 거대한 ‘재고 정리 세일’을 하는 경향에 주목했습니다. 그녀의 작업은 예언적이면서 동시에 과거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만약 Tickle이 오늘날 살아 있다면, 지난 10년 동안 전면에 등장한 분열과 격변의 종류와 이러한 ‘대화’의 분위기와 어조를 더욱 충분히 탐구하기 위해 ‘위대한 출현’의 개정판을 써야겠다는 강박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궁금합니다. 지금은 ‘Emergence; 출현’이란 표현보다 ‘ reckoning; 결산’이란 표현이 더 적절해 보이긴 합니다.
누가복음 12:49-56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