잰 리처드슨(Jan Richardson)은 이 본문을 “식탁의 끝없는 지혜 (the endless wisdom of the table)” 를 보여주는 여러 본문 중 하나로 설명합니다. 물론 이 지혜는 예수님께서 공동체를 새롭게 하기 위해 그 공간을 변혁시키시는 방식에서 비롯됩니다.
지난주 본문을 막 끝낸 직후, 오늘의 교회력 본문은 안식일에 있었던 치유 사건(2-6절)을 건너뛰고 안식일 식사 장면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1절을 도입으로 포함하면 흥미로운 대비가 형성됩니다.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이 서로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주시하는 방식은 안타깝게도 대부분 예수님의 지혜를 받아들이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호기심과 탐구적인 질문,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설명하거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이야기 속으로 초대하십니다. 식탁에 앉은 다른 손님들의 모습을 살펴보시며, 예수님은 그들의 현재 상황에서도 실제로 일어날 수 있었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자주 사용하시는 장면 중 하나인 혼인 잔치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비유라기보단 현재 상황에 대한 조언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것을 비유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분이 전하려는 지혜가 단순히 이 순간이나 이 이야기 속 인물들에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항상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서 ‘손님들(guests)’이라는 단어가 헬라어 완료분사 형태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처음부터 누가는 우리가 늘 “영원한 손님” (perpetual guests)임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식탁에서 주어지는 첫 번째 지혜입니다. 즉, 우리는 언제나 창조주에 의해 생명과 식탁에 초대받은 손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항상 손님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로서, 두 번째 식탁의 지혜는 크게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바로, 손님으로 있는 어떤 자리에서든 자신의 위치나 중요성을 당연하게 여기기보다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영원한 손님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것은 어디서나 해당됩니다!) 잔치에서 가장 영예로운 자리는 주인 옆자리였습니다. 자동적으로 자신을 주인 옆자리에 앉히는 것은 곧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이 만찬에 한 사람만 초대할 수 있었다면, 주인은 분명 나를 원했을 거야.” 이렇게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는 것일 뿐 아니라, 모두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셈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예수님의 이야기는 놀라운 전환을 맞습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주인이 당신에게 무언가를 말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어색한 분위기가 되는 거죠. 당신보다 더 고귀하고 존경받는 사람이 있다면, 주인은 모든 사람 앞에서 당신을 낮춰야만 합니다. 누가복음의 ‘크나큰 역전’의 원리대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스스로를 너무 높이 평가한 사람은 결국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 불명예를 당하는 상황에 처하기보다, 처음부터 겸손한 자세를 취하라고 하십니다. 영예로운 자리 대신에 “가장 먼 구석 자리”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식탁 지혜의 일부입니다.
첫째로, 이것이 식탁의 지혜인 이유는 주인이 당신을 부끄럽게 하지 않고 오히려 높여줄 기회를 남겨두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친구라 부르며, 식탁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더 중심으로 옮겨줌으로써 영예를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승진’은 우리가 자기중심적이지 않을 때, 즉 우리가 겸손할 때 (곧, 겸손의 태도를 가질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하면서도 아름답지만, 동시에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도전이기도 합니다. 겸손한 손님의 자세를 취하면, 우리는 큰 축복과 영광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과시하려 한다면, 결국 사람들의 진짜 평가를 드러내는 수치스러운 순간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손님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가 타인을 식탁에 초대하는 주인의 역할도 할 수 있음을 인식하십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때때로 영향력과 소속감을 결정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식탁의 지혜를 또 하나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손님으로서 경계에 앉는 법을 배우면, 우리 자신의 식탁에 누구를 초대해야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겸손한 주인으로서의 실천 방법은 넉넉한 초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식탁 지혜의 두 번째 측면입니다. 가장 먼 자리에서 시작하듯, 우리 식탁에는 소외된 이들, 사회적으로 무시받거나 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들은 우리에게 보답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겸손한 손님이었듯, 겸손한 주인이 된다면, 우리는 단지 그들과 같은 자리에있게되는 것만을 기대할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지적하시듯 우리는 종종 무엇인가를 돌려받을 사람들만 초대하려 합니다. 실제적인 물질이든, 기회든, 소속감과 사랑의 감정이든 말입니다. “다음엔 그들이 우리를 초대하겠지.”라는 기대 속에서 우리는 이미 우리의 시선을 가장 좋은 자리에 두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현재 우리 집과 우리 식탁에서 배고픈 이들을 섬기기보다, 미래의 우리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갚을 수 없는 이들에게 베푸는 너그러움의 자세는 헛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느껴질지라도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끝없는 식탁의 지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겸손과 마찬가지로, 너그러움 역시 결국 “모든 주인들의 주인 (하나님)”께서 의인들이 부활할 때 갚아주십니다. 부활 자체가 하나님께서 겸손한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높여주시는 은혜로운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식탁 지혜는 지금 내가 앉은 자리의 좋고 나쁨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식탁 지혜는 가능한 많은 상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평등하고 좋은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식탁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신 삶을 넉넉하게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식탁 지혜는 그분의 좌석 배치도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서로 다른 이들을 엮어 하나 되게 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식탁 지혜는, 우리가 주인이 되는 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손님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적 관찰
손님으로서의 영원한 정체성은 두 개의 다른 헬라어 완료분사로 더욱 강조됩니다. 첫 번째는 8절에서, 예수님께서 더 고귀한 사람이 “초대받았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실 때 등장합니다. 두 번째는 10절에서, “주인” (직역하면, 당신을 초대한 사람)이 와서 당신을 더 낮은 자리로 옮기라고 말할 때입니다. 이 모든 완료분사—손님, 더 고귀한 손님, 주인—는 모두 동일한 헬라어 동사인 “부르다; 초대하다”에서 파생됩니다.
예화 아이디어
‘마블러스 미세스 메이즐(The Marvelous Mrs. Maisel)’의 파일럿 에피소드에서, 주인공 미지가 1950년대 정육점 안팎에서 외칩니다. “우리가 랍비를 모셨어!” 그녀는 랍비가 욤키푸르 금식을 마친 후 자신의 가족과 함께 식사하러 오게 되어 매우 흥분합니다. 이는 해당 유대교 회중 내에서 치열한 경쟁 속에 얻은 귀중한 기회입니다. 랍비가 저녁 식사에 오는 것은 매우 좋은 신호이며, 그녀와 그녀의 약혼자가 선호하는 결혼 날짜를 랍비로부터 확보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의미입니다.
이 가족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고귀한 손님을 초대한 것에서 오는 영예뿐 아니라, 그 손님이 그 대가로 줄 무언가에 있습니다. 만약 결혼 날짜가 걸려 있지 않았다면, 랍비가 저녁 식사에 오는 것이 정말 그렇게 큰일이었을까요? 또, 랍비의 호감을 얻기 위해 그가 좋아하는 양고기 부위를 일부러 준비했을까요? 결국, 우리의 초대와 친절 뒤에 숨은 이기적 동기를 돌아보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누가복음 14:1, 7-14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