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견과 질문과 관찰
부활절과 크리스마스도 그렇지만, 탕자의 비유처럼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들에 대해 여러분이 어떤 말을 덧붙일 수 있을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순절 상황에서 지난 주간의 본문의 경고를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정돈’하라는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주는 교훈과 본문의 맏아들 사이에 자연스러운 연결고리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저는 자신을 낮추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높이신다는 성경의 약속을 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성품에서 드러난 깊은 진리, 곧 그가 너무나 선한 나머지 비록 (아들이 아닌) 그의 하인일지라도 지금의 자신보다 더 낫게 대우해 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는 시편 기자가 말한 아버지의 집에서의 하루가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더 낫다는 교훈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종이라도 되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는, 엄청난 사랑과 기쁨으로, 둘째 아들의 완전한 명예와 소속을 회복시켜 줍니다. 아버지는, 죄가 그런 것처럼 물리적인 분리를 초래할지라도 둘째 아들이 자신의 마음의 욕망을 따르게 될 것을 허용합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그가 자신의 죄 때문에 더 이상 고통을 겪게 하지 않고, 자비를 베풀며, 그에게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베풀어 줍니다.
맏아들은 집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버지와 다른 길을 걸어 왔던 것이 드러납니다. 그의 길은, 말하지 않았던 모든 것과 그의 생각이 떠돌던 것과 스스로 말한 것 중 확고한 “복음의 진리”와 그의 내면에 굳어져 있던 이야기들에 의해 포장되어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의 회개가 아버지의 성품에 대한 지식에서 비롯되었던 것에 반해, 맏아들의 분노는 자신의 독선에서 발화되었습니다. 동생이 돌아왔고 잔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신이 그동안 받지 못했던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내 잔치는!? 나는 지금까지 다 잘 해 왔는데! 이런 그의 반응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맏아들이 어떤 항목들을 준비해 왔는지, 동생보다 낫다는 사실을 증명할 어떤 것들을 기록해 왔는지 궁금하게 만듭니다. 그는 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들에 나가 일했고, 순종했고, 자신의 이익을 희생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동생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축하를 받고 있습니다. 사실은 정반대가 되어야 맞습니다. 그는 추방당하고 버림받아야 햇습니다.
우리는 맏아들의 설명을 통해 둘째 아들이 무슨 일을 해 왔는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본문 요점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동생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모든 재산을 창녀들에게 썼다고 주장할 때 맏아들이 둘째 아들에 대한 내부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맏아들이 날마다 옳은 일에 “충실”하기 위해 괴로워하면서 자신에게 해왔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맏아들이 그렇게 화가 난 이유가 자신이 옳은 일을 하기 위해 괴로워했기 때문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의 반응이 그의 동기를 드러냅니다. 그는 우월감이나 유산과 같은 일종의 보상을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맏아들이 그렇게 화가 난 이유가 정의가 존재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까? 형제들 간에도 관계 회복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 가장 우선적인 것은 둘째 아들과 가장 큰 죄를 지은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입니다. 화해와 보상에 관한 권리는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맏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화가 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기분이 상했습니다. 심지어 아버지에게 화를 냈습니다: 왜 나와 내 친구들을 위해서는 송아지 한 마리도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의 문제는 결과적으로 정의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와 그의 동생이 각자의 행동에 따라 상대적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것에 대한 그의 개념에 관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온화한 대답은 맏아들이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와 같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끊임없이 보살핌과 사랑을 받았고, 포도원 주인인 아버지께 속한 모든 것을 갖도록 끊임없이 초대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와서 그것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아 삐치고 화를 내는 쪽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더 많은 호의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자신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내면의 생명과 열매의 빈약함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의 순종과 드러난 행동은 사실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살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도 그는 세상적인 잣대로 점수를 매겨 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시면서 자신의 사랑을 아들에게 부드럽게 상기시켜 주십니다. 맏아들과 둘째 아들 모두 아버지의 은혜로 살고 있으며, 두 사람 모두 자신이 가진 것 중 어느 것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차이점은 한 사람은 아버지의 자비에 의지했던 것에 반해, 다른 한 사람은 그들이 얼마나 가망이 없는지, 아버지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지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본문처럼 오늘 본문도 결말이 열려 있습니다. 맏아들이 잔치에 합류할까요? 내면의 점수 카드를 아버지에게 넘기고 하나님 나라의 성품과 가치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복종하는 법을 배울까요?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자신에게 말해왔던 자기 의에 대해 회개할까요? 우리는 둘째 아들처럼 정신을 차리고 하늘 아버지께 돌아가기 위해 시간을 낼까요? 기쁨과 사랑의 축하와 성령의 열매가 우리의 삶의 특징이 될까요? 아니면, 괴로움과 분노가 뿌리내리도록 내버려 둘까요?
본문 요점
본문은 둘째 아들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면서 그가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낭비했다”고 말합니다. “방탕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도덕성이나 지출에 있어서 낭비하거나 절제력이 부족한 것을 의미합니다. 본질적으로 낭비에 있어서 제한이 없는 것입니다. 맏아들이 구체적으로 말하긴 했지만, 동생이 창녀에게 모든 재산을 탕진했다는 것은 사실에 근거한 판단이라고 하기보다 추측에 가깝습니다. 그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분노와 자기 연민의 감정에서 나온 것이며, 또한 현실을 지나치게 과장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둘째 아들의 행동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지만, 맏아들은 아버지의 목적이 아니라, 옳고 그름, 추측과 비교에 대한 자신의 내적 이야기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예화 아이디어
이 이야기를 묘사하기 위한 시각 예술 작품이나 음악 작품이나 문학 작품들이 많습니다. 이번에 특히 제 눈길을 사로 잡았던 인상적인 작품은 맏아들의 분노를 시각화한 James B. Janknegt의 ‘Two Sons’입니다: 잔치 중에 너무 화가 나서 자신의 기타를 부수고; 그로 인해 기쁨에 동참할 수 없게 된 큰 아들의 모습을 아주 명쾌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정확히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저는 이번 팬데믹 기간 내내 많은 분노를 보았습니다. 그 중 한 단면은 맏아들의 분노와 섬뜩할 정도로 비슷합니다. (저는 백신 접종에 전적으로 찬성하는 사람입니다. 코로나19와 관련된 입원 때문에 꼭 필요한 수술이 연기된 경험도 있습니다.) 코로나 백신이 널리 보급되었지만 백신 접종 거부를 선택한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종종 다른 의무사항들을 무시하고) 감염되어 의료 체계에 큰 부담을 주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하는 동료 백신 접종자들의 소리에 동참하고 싶은 유혹이 매우 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백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치료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분노에 차 있었습니다. 우리의 결정에 따른 결과가 중요합니까? 아니면,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까? (이 두 가지가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사랑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패러다임에 어떻게 부합할 수 있을까요?)
답하기 쉬운 질문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큰아들과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잘 대우받는 것에 화가난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의 분노가 다른 사람들보다 우리 자신에 대해 더 많이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노는 정의와 은혜에 대한 우리의 내면과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견해와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우리의 동기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작동시키고 싶어하는지에 대한 것을 드러냅니다. 분노 자체가 문제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노가 우리를 하나님이나 이웃에게 죄를 짓게 하거나 사랑과 은혜에 대해 우리를 강퍅하게 하거나 모든 사람을 위한 삶을 추구하는 것에서 돌아서게 하거나 우리 자신의 은혜 경험과 우리가 받을 만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는 것에 대해 우리를 눈멀게 한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분노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항상 누릴 수 있는 잔치와 기쁨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하고 있다면, 우리는 결국 부루퉁한 체, 씁쓸해 하고, 외롭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5:1-3, 11b-32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