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7:11-19 주석

멀리 서서 자비를 구하는 것에서부터 예수님의 발끝에 다가와 엎드려 찬양하는 것까지, 치유 받은 나병 환자는 참으로 놀라운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물론 치유 받은 다른 나병 환자들도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치유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다른 아홉 명이 돌아오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지나치게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세부 내용을 다루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만들어 내야 할 의미에 대한 단서들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본문 아래에서 논의 되는 질문들은 보십시오: 예수님이 이 질문들을 던지는 방식은 아홉 사람이 똑같이 기적적으로 치유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더 나아가, 누가는 홀로 감사했던 그 사람을 사마리아인으로 묘사합니다.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은 유대인이었다는 암시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외국인’이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 곳은 이 곳이 유일합니다. I. Howard Marshall에 따르면, 예수님이 사용하신 이 단어는 역사적 맥락에서 특정한 의미를 가집니다: ‘외국인’은 유대인 남성이 아닌 사람의 출입을 금하는 성전 바깥 표지판에 쓰인 문구였습니다. (NIGTC series, The Gospel of Luke)

그래서 이 남자는 여러 이유로 다른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는 사마리아인, 즉 외국인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자신의 고통을 알려야 하는 나병 환자입니다. 그가 자신의 상황을 알리지 않으면, 다른 사들이 부정하게 될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레위기 13:45). 나병이 치유되더라도, 그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예외입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가 예수님의 말씀과 지시를 따랐기 때문에 그들이 어느 정도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설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치유와 관련 된 어떤 물리적인 행위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제사장에게 가서 검사를 받고 정결함을 선언 받는 의식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정결함을 선언 받으면, 그들은 다시 공동체에 합류하여 온전함과 소속감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는 도중에 그들이 변화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이를 알았고,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한 사람만 돌아섰습니까? 치유를 받은 다른 아홉 명은 회복의 가능성에 너무 압도되어 기적을 행한 자에게 감사하는 것을 잊었던 것입니까? 제사장에게 허락 받는 것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일이 끝날 때까지감사하는 것을 미루고 있었던 것입니까?

우리의 나병 환자는 사마리아인으로, 제사장의 축복을 받기 위해 다른 성지 (그리심 산)로 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Darrell Bock, ECNT series Luke 9:51-24:53) 혼자 있었고, 따로 있었던 것이 이 사람이 감사를 표현하게 하는 데 더 적합했던 것입니까? 그가 집단 사고에 휘말리거나 동료들로부터 압력을 느끼지 않았겠지만, 다른 나병환자들보다 더 많은 고난을 겪으며 세상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던 사실에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까? 그 사실이 모든 나병 환자들 (그리고 우리들)에게 진실인 것, 즉 예수님의 자비가 놀랍다는 것을 알게 한 것입니까?

아니면, 그의 고난과 세상이 그를 대하는 방식이 그로 하여금 감사와 찬양과 봉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올바른 관점을 갖게 해준 것입니까? 이 사람은 제도적으로 정결함을 확인 받는 대신, 자신이 ‘교회’보다 더 강력한 하나님의 대리자, 즉 더 강력한 존재를 만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나병 환자가 자신이 건강해 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말하자면, 그가 피부를 보거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을 보거나, 신경이 치유되어 촉각과 감각을 되찾으면서 육체적으로 뭔가를 느꼈을 때, 그는 바로 돌아서서 예수님께 향합니다.

이야기의 흐름을 볼 때, 그가 제사장에게 가라는 예수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대신, 그는 자신의 삶 속에 있는 심오한 선함의 근원이신 예수님께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치 영화 ‘It’s a Wonderful Life ‘에서 George Bailey가 천사 Clarence와의 모험에서 돌아와 자신이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것처럼, 우리의 사마리아인 역시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전에는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야 했던 그가 이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감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인 남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행하신 일에 대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전적인 과제를 완료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 예전적인 과제가 그로 하여금 공동체에 부분적으로나마 다시 통합될 수 있게 해 주고,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구원을 과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우선적으로, 그는 감사를 말하기 원합니다. 자신을위해 그 일을 행한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기 원하고, 예배를 드리기 원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예수님이 다른 아홉 명은 어떻게 되었는지 물으셨던 이유일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다른 아홉 명이 고침을 받은후, 그들이 어떻게 다른 행동, 다른 단계를 선택했는지에 강조하십니다. 여러분도 ‘내가 가장 먼저 할 일’과 같은 시나리오를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복권에 당첨된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무엇입니까? 꿈의 직장을 얻는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무엇입니까? 만성 질환이 사라진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인생에서 한 가지를 바꿀 수 있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에 대한 감사가 당신의 계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말 그대로 하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을 그리스어로 보면, 완료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완료 시제는 일회적인 행동이 미래에도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을 때 사용됩니다.) 사마리아인이 감사 찬양을 통해 표현한 믿음은 일회적인 행동이 아니라, 근본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은 남은 생애 동안 그를 인도하고 축복할 것입니다. 그가 도움과 축복이 필요할 때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지 알고 있기 때문에 제사장이 무엇을 선언하든 이 사마리아인은 괜찮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아멘.

본문 요점

예수님이 17절과 18절에서 던지신 질문은 (그리스어 문법에 따른) 수사학적 질문입니다. 특히 중간 질문이 매우 강력합니다. 예수님은 문자적으로 “그런데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예화 아이디어

사마리아인은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 돌아왔고, 예수님은 그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시며, 그의 감사가 믿음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암시하셨습니다. 감사를 표현하는 것의 유익이 점점 더 인정 받고 있습니다. 저는 몇 년 전에 다른 사람들이 감사 표현을 목격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기사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적 유대감이 강화될 뿐 아니라,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현하는 이들에게 끌리게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기사 내용 중 한 부분이 신앙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Sara Algoe 교수는 ‘감사하는 사람이 시간을 내어 자신을 벗어나 상대방의 행동에서 좋은 점을 주목할 때, 감사가 긍정적인 감정과 구별된다’고 말합니다. 신앙을 표현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벗어나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의 위대한 점에 주목하게 됩니다. 전체 기사는 이 link를 통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