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9:1-10 주석

삭게오와 예수님은 이야기에서찾는 묘사됩니다. 찾는 또는 보는 것은 단락의 중심이며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삭게오는 보기를 원하고, 예수님은 찾고 계시며, 청중은 보고 있습니다.

독자인 우리 조차도 보는 것을 통해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갑니다: 누가는 삭게오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데, 특별히 헬라어인 이두 (“보라! 주목하라!”) 단어로 삭게오가 세리장이요 부자임에 주목하게 합니다. 세금 체계를 감안할 , 삭게오가 억압을 통해 부를 축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그의 지역에서 세율을 정할 있는 권한이 있었고, 표준 세율 이상을 거둔 돈을 자기 것으로 가질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삭게오가예수가 누구신지를 보고 싶어하지만여러 이유 때문에 그를 없는 상황임을 있습니다. 첫째, 그는 키가 작습니다. 둘째, 군중이 그를 전혀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세리에게 공간을 내주지 않으려 합니다. 이러한 정보는 삭게오가 여리고에서 얼마나 존경받지 못했는지 (이보다는존중할 가치가 없다 말이 어울립니다) 보여줍니다. 어느 누구도 삭게오를 때에 좋은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나사렛 예수에게는 삭게오가 그를 보고 싶어 하게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삭게오는 군중에 방해받지 않으려고 쪽으로 달려 나갑니다. 그를 보기 위해 삭게오는 가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합니다. 케네스 베일러가 제공한 문화적 배경에서 본다면, 당시에 성인 남성은 1) 뛰거나 2) 나무에 오르는 모습은 결코 보이고 싶어하지 않은 행동입니다. 삭게오는 예수를 보고싶다는 일념으로 그런 행동을 함에 있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삭게오는 사람들이 나무에 있는 그를 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을까요?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가 나무에 올라가 지나가는 예수를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고 삭게오를 올려다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삭게오! 거기서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너의 집에 머물러야겠다 하셨습니다. 저에게 장면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사회 통념을 깨면서까지 예수님을 보려 했던 삭게오의 열정이 이번에는 사회 통념을 예수님의 행동 속에서 그대로 재연됩니다. 세리의 집에 머물게 되면 예수님은 부정하게 되실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삭게오의 집에 머물러야 한다고 하셨지만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십니다. 삭게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그렇게까지 애써야 했던 이유를 정확히 없듯이 말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 보았고, 서로에게 연결되었습니다. 누가복음은 삭게오가 나무 위에 있다는 것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서둘러 내려와서 기쁨으로 예수님을 맞이했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삭게오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그토록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는지 알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성령이 역사하셔서 그의 마음을 활짝 열어놓고 그리스도를 맞이하게 하셨음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야기에서본다 것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모든 이들은 그분과 삭게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보았지만 그들이 것에 대해 그리 기쁘지 않았고 혀를 끌끌 차면서 수군거렸습니다. 그들의 속에는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 예수님과 삭게오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삭게오에게 내려와서 회개하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친절하게도 성령이 이미 시작하신 일을 따라가며, 삭게오의 한가운데로 스스럼없이 들어가십니다. 회개와 변화의 삶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것을 확신하고 계신 듯이 말입니다. 삭게오가 완벽하거나, 죄가 없거나, 거룩하고 의로워지는 것을 먼저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삭게오가 그를 찾고 있었음을 아셨기에게 그의 삶에 먼저 들어가십니다. 나머지는 방향으로 길게 순종하는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실현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열매가 이미 이야기에서 맺히고 있음을 있습니다. 8절이 즉시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시간이 흘러 저녁 무렵에 삭게오가보십시오” (여기서 다시 쓰인 단어는 헬라어이두입니다)라고 말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저는 가난한 자에게 재산의 절반을 것입니다. 제가 누군가를 속였다면, 그에게 배로 갚아주겠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것을 예수님에게 말한 것인지, 불평하는 군중에게 것인지, 자신에게 또는 모든 이들에게 것인지 질문하게 됩니다.  

케네스 베일리는 삭게오가 비록 그의 재산으로 무엇을 것인지에 대해 과장했을지라도 그가 과장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그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변화되고자 하는 그의 결단을 보여주는 표시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북미와는 달리 이천년 전의 중동 지역에서는 삭게오가 이처럼 과장된 말을 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는 사실은 다른 이들이 자신의 말을 듣기를 원했다는 뜻입니다 (저녁 늦게였다면, 그는 아마 식사 중에 기대어 있다가 일어나 모두를 향해 연설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10절에서 하신 말씀을 보면, 삭개오의 결단은 대부분 예수님을 만난 결과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삭개오는 말을 예수님께 하는 것이며,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목격하고 있다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 안에서 어떻게 역사하게 하시는지를 생각해보면, 말은 무리들이 듣고 그가 약속을 지키도록 책임을 지게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또한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 회개와 회복에 대한 결단입니다. 삭개오는 하나님에 의해 의롭게 되고 있으며, 내적인 변화로 인해 이제 의롭게 살아가려는 강한 의지를 갖게 됩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발을 땅에 굳게 디딘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10절에서본다 주제를 끌어오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삭게오가 구원을 받았다 (신적 수동태) 말씀하시는데, 세리 (압제자) 또한 하나님의 자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삭게오의 진짜 모습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는 그들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요. 인자란 표현은 여기서 의도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인간됨을 강조함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보셨는지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로 직접 들어오셔서 스스로를 초대하셨습니다. 성육신 안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하자고 하셨고, 땅에서 우리 가운데 머물러야 한다고 말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구원의 일부입니다. 그는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러 오셨기에 그렇게 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비록 나무 뒤에 숨을지라도 우리를 찾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본문 요점 

이야기는 바로 앞에 나온 맹인이 눈을 이야기와 종종 함께 묶여서 다뤄집니다. 보세요! 여기서도시력보다 주제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다른 방식으로도 평행을 이룹니다. 등장 인물을 서로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소경은 억압 속에서 고통받으며, 생계를 위해 구걸을 해야 했습니다. 반면에, 삭게오는 다른 사람의 수고 위에 자신의 부를 축적한 압제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보여지고, 구원받고, 변화됩니다.

예화 아이디어

저명한 신학자인 후스토 곤잘레스는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주신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이미지와 다른 연결점을 제시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부르시어 미지의 세계로 이끄신 인물이었습니다. 삭개오 같은 사람에게 있어 예수님과 그분의 길에 회심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삭개오는 정직하게 살아가고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의를 배워가는 과정에서 꾸준히 회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길을 잃었다가찾아진다 것이 단지 방향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전혀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우는 것이라는 점을 잊곤 합니다. 이야기 속에서, 그리고 누가복음 전반에서 우리를 묘사하는잃었다 단어는 헬라어 문법상 완료 시제로 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가 잃어버린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주실 비로소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실 , 우리는 자아와 모든 방식들을 버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골로새서 3장에서 말하는 사람을 입는 입니다. 아브라함과 삭개오처럼, 우리도 새로운 목적과 새로운 희망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어떤 모습이 될지는, 우리가 길을 가보아야만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