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사실은 예수님에게 이 특별한 질문을 던진 사람들이 사두개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천국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곱 형제를 남편으로 두었던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그들은 천국 개념의 어리석음을 드러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육체가 죽을 때 영혼도 그 존재를 멈춘다고 믿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이 가진 것이 이 땅에 있을 때만 의미를 갖는다는 뜻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죽지 않는 것에 가장 가까운 것은 자신의 이름과 유산을 자녀들이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사고에 있어서 완전히 낯선 개념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믿지 않는 것(천국)을 자신이 가진 가장 가까운 것(유산)에 적용했고, 그런 다음, 이 땅에서 추구하는 것과 동일한 수단을 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손들을 통해 어떤 목적과 유산을 추구한다고 합시다. 첫 번째 남편이 이 땅에서 시작한 일이 어떻게 두 번째 남편과 세 번째 남편 등으로 이어지면서 천국에서 완성될 수 있겠습니까? 그 당시 문화가 그랬던 것처럼 사두개인들도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강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남자와 그 자손들에 관한 것이며, 그것이 이 땅에 존재하는 방식으로 “하늘”에서도 존재합니다.
반면, 예수님은 하늘과 땅을 “이 시대”와 “저 시대”로 구분하여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더 나은 방식의 신학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서 시작하셔서 인간 존재의 기초를 재조정하십니다. 이것을 사두개인의 유산에 대한 이해에 적용하자면,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유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산’,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부활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미래의 약속 때문에 현재를 살아갑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 시대에 경험되고 알려진 방식의 죽음을 다시는 겪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불타는 떨기나무를 통해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것을 통해 이것을 설명하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 하나님은 족장들의 ‘하나님이었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하나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정체성의 본성에 대한 현재 시제의 단순한 사용이 우리에게 인간 존재에 대한 어떤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항상 하나님께 살아 있는 존재라는 사실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항상 그분 앞에 살아 있도록 하셨을 뿐 아니라, “살아 있음”이 단지 이 세상에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아래 본문에서 지적했듯이,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현재 수동태 동사로, 성경의 다른 곳에서 외치는 것, 즉, 하나님은 우리를 영생으로 살리시는 일을 하시고, 하나님은 부활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부활 능력의 자녀라는 것을 속삭이고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인간에게 중요하다고 믿는 것에서 출발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시를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학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를 가져 옵니다. 같은 것을 말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의미하고 또 매우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그분의 행동으로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영원한 성품에 기초하지 않고 인간 경험의 모래성 위에만 신학적 집을 지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줍니다. 우리의 경험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 무엇이든 알고 싶다고 하면서 우리 자신에게만 관심을 기울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상을 만드는 데 매우 능숙하며, 그 우상을 우리의 눈가에 두는 데도 매우 능숙합니다. 유산은 아닐지 몰라도, 천국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도 사두개인들처럼 이 시대의 우리의 우상과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들을 식별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이라는 단어조차 언급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아차리셨습니까? 아마도 사두개인들이 천국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셨을 지도 모릅니다. 또는 천국이라는 단어가 너무 많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더 중요한 다른 초점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싶어서 사용하지 않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Luke Timothy Johnson은 사두개파 사람들을 “폐쇄적인 종교”를 가진 사람들로 묘사합니다. 천국에 대한 그들의 관점은 좁고 형식적이었으며, 이 땅의 삶에 대한 그들의 관점 역시 좁았고,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이 시대는 다가올 시대와는 전혀 다르며, 우리가 이 시대에 살고 있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그 시대에 속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 시대에 속한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상속자, 하나님의 자녀, 존재가 변화 또는 변혁 된 자녀, 부활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능력, 그리고 이 시대의 마지막 날에 우리를 일으키실 그 능력은 이미 우리 안에 살아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부활이 현재의 현실인 것처럼, 우리에게도 부활은 현재의 현실입니다. 일이 달라질 수 있음을 알고, 일이 달라질 것임을 알고, 일이 마땅히 되어야 할 대로 추구하는 데 충실하는 것이 바로 부활의 자녀들이 현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임을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상의 삶과 경험을 통해 천국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즉, 천국이 단순히 현재의 우리 존재 방식의 연장선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통해 천국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며, 그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하나님의 경험적이며 끝없이 지속되는 구체적인 현존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기에,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요점
부활 이후 완전히 변화된 인간 존재의 본질이 이 구절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자녀, 곧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이상 죽지 않으며, 장가를 가거나 시집을 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모든 내용이 현재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죽은 자들이 부활한다”는 표현은 수동태 현재 시제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고(현재 시제), “그에게는 모두가 살아 있습니다”(다시 현재 시제).
우리가 지금 이미 부활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줍니까?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이 생각이 ‘이미 이루어졌지만 아직 오지 않은’ 삶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시대에 침투하고 뿌리를 내리면서 영원한 시대의 선한 가치와 정신을 지금 이미 추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추구합니다.
예화 아이디어
아마존 서점의 종교 및 영성 분야에 “임사체험”에 관한 도서 목록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무려 7,000권이 넘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서적 분야에 “종말론”이라는 제목 아래 천국에 대한 글들이 있는데, 모두 1만 권이 넘습니다 (물론, 모든 책이 천국에 대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과연 올바른 질문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왜 미래를 알고 싶어 합니까? 천국에 대한 이러한 책들은 천국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은 마음에서부터, 내세에 대한 기대감과 새 시대를 열어 줄 하나님의 강력한 심판에 대한 갈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동기를 드러냅니다. 천국에 대한 좋은 질문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과민한 호기심에 묻혀 쉽게 잊혀집니다. 마치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부활에 대한 계시가 다른 관심과 추구와 강력한 과시에 대한 욕망 속에서 길을 잃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누가복음 20:27-38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