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와 다음 주, 우리는 선포자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와 관련된 표적들은 분명합니다. 여러분이 그것들을 알 수 있다면 말입니다. 첫째, 누가가 요한의 메시지가 선포 된 역사적 순간을 정확히 알리기 위해 정치적 맥락을 제공할 때 누가복음 2장 안에 분명한 전환점이 보입니다. 구체적인 정황 등을 볼 때, 요한은 BC 28년 또는 BC 29년, 회개의 세례를 통해사람들을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본문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 요한에게 임한지라”라는 말은 구약의 선지자 소명 내러티브와 같은 형식을 갖춘 것으로, 요한이 생각하는 어떤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전하라고 내려 주신 메시지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요한의 메시지가 지도자들이나 국가 전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고, 또한 어떤 지리적 한계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광야로부터” 나와 “사방으로” 옮겨 다녔을 것입니다. 아마도, 갈릴리 바다와 사해 사이를 북쪽으로 잇는 요단강, 거리로는 약 251km(156 miles) 정도를 여행했을 것입니다. 요한은 옛 선지자들과 달리, 지도자들을 찾아 다니지 않았고,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해 예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길 위에 있는 초대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직접 찾아가서, 들을 귀와 준비된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오게 했습니다.
저는 지난 10년 동안 신체적 장애를 안고 살아 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그러나 지속적인 육체 노동을 상당히 제한 받는 정도의 장애를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 나오는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백성들에게 한 말을 들을 때, 길을 준비하고 만들기 위해 삽질을 하고 포장을 하고 무거운 것들을 들어 옮기는 장면을 생각하면 불안해집니다. 하나님 나라의 선한일에 동참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면서도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정말이지 긴장하지 않을 수 없고, 제 자신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회중 가운데 저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상상해 봅니다. 또한 여러분의 회중 가운데 기회를 붙잡기 위해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상상해 봅니다. 그들은 부지런합니다. 유용합니다. 판도를 바꾸는 것을 좋아합니다. 선한 일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저도 그렇지만, 저와 거의 정반대 입장에 있는 사람들도 이 구절을 제대로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이곳 저곳 다니며 베풀었던 예언과 세례 ‘사역’에서 보여준 접근성처럼, 이사야 40장에 나오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묘사에 대해 모든 사람이 접근 가능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길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래 ‘본문 요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남은 부분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마른 땅을 걸을 수 있도록 홍해를 가르신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열린 평탄한 길을 만드시기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오시고 우리가그분과 동행하는 길에 방해 되는 모든 장애물들을 그분이 그분의 강력한 손길로 처리하고 계십니다.
우리 자신을 준비하고, 우리의 안에 있는 길을 바로 잡는 것 자체로 충분합니다. 그래서 요한의 선포가 죄 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와 짝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제 어떤 종류의 세례를 베풀든, 성경적인 세례라면 항상 씻음과 정결을 드러냅니다. 또한 세례에는 부르심의 측면도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로 사람들을 인도했을 때,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후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과 비슷한 방식을 취했습니다. 요단강을 통해 동쪽 광야에서 서쪽 약속의 땅 이스라엘로 들어간 것입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의 이동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포로생활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때 취했던 방향입니다. (앗수르와 바벨론은 모두 동쪽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기 전에 요단강을 따라 북쪽에서남쪽으로 이동했을 것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재현하는 일은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자신의 방향을 다시 설정하고 중심을 다시 잡는 것으로, 이것이 회개의 두 번째 측면입니다. 옳지 않은 것에 대해 고백하고 난 후 취해야 하는 또 다른 행동은 자신이 원하는 것 반대 편에 있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용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용서 받기 위한 것이나 용서 받은 것에 대해 보상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두려움 없는 회개와 하나님께 대한 재헌신이 우리를 정결하게 하신 용서의 은혜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은혜로 충만한 이 순환조차 놀라우신 하나님의 접근성을 말해줍니다. 아무도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왜 그 분이 그토록 중요한지 모르는 상황 가운데 요한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도록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성육신의 삶과 사역과 죽음을 통해 중보자가 되셨고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서 40장에서 이말씀을 전했을 때, 그리고 요한이 이 말씀을 전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었던 것처럼,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접근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회개와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길에 헌신함으로써 그분의 재림을 계속 준비합니다. 그러면서 그분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겠다는 약속이 그분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그분의 길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준비함으로 그 전환이 좀 더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게 합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다음 주에 우리는 회개와 세례의 길을 따를 때 우리가 어떤 삶을 살도록 초대받는 지에 대한 세례 요한의 광야 외침을 듣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 말입니다. 이번 주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행하실 일을 축하하고 그 안에 머무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축하는 것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분과 진리를 알게 되고, 그 진리대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요한에게 말씀을 주시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길을 떠나시는 하나님, 산을 깎고 골짜기를 메워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분과 함께 살 수 있는데 필요한 일들을 하고 계십니다. 이 두 주간의 메시지가 언약의 양쪽 측면을 묘사한다고 보면, 이번 주 강조점은 하나님의 약속의 측면에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을 이해하고 고수한다면, 다음 주 우리는 더욱 풍성한 초대를 듣게 될 것입니다.
본문 요점
4절에 ‘준비하라’와 ‘곧게 하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그런데 5절에 나오는 지형의 변화에 대한 설명은 명령형이나 명령과 관련된 동사 형태로 되어 있지 않고 미래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주어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구절을 “신적 수동태”로 해석합니다. 문장의 주어인 모든 골짜기와 산과 언덕이 동사의 작용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종종 주어 없이 피동사의 동작을 하는 분으로 나옵니다. 이런 경우 신적 수동태가 사용되어, 길을 곧게 함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것은 우리지만, 모든 큰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화 아이디어
어릴 때 친구 집에서 자던 날, 집에 가고 싶었던 기억이 있으십니까? 몸이 좋지 않았을 수도 있고, 놀림을 받았을 수도 있고, 창피한 일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숨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하기 싫은 일을 하라는 친구들의 성화가 불편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부모가 와서 우리를 구해주기를 바랬던 그때를 기억합니다. 그때 우리는 짐을 챙겨 최대한 문 가까이 있었습니다. 곧 빠져 나갈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3장에 묘사된 하나님께서 모든 골짜기를 메우시고, 모든 산을 평평하게 하시고, 굽은 길을 곧게 펴시고, 걸림돌을 제거하셔서 평탄하게 하신 이 일들은 부모님이 우리를 집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나타나셨을 때 느꼈던 안도감과 희망을 떠올리게 합니다. 안도감. 안전함. 사랑. 부모의 보호와 이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것입니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에 대륙횡단철도가 건설될 때 서부에서 동부로 향하던 690마일 되는 Central Pacific 철도와 동부에서 서부로 향하던 1086마일 되는 Union Pacific 철도가 유타 주의 프로몬토리(Promontory, UT)에서 만났습니다. Central Pacific 철도가 더 짧았던 이유는 시에라-네바다 산맥(Sierra-Nevada Mountains) 때문입니다. Central Pacific 철도가 산길을 관통하는 동안 Union Pacific 철도는 평평한 미국 평원을 통과하며 4배나 되는 철길을 만들어 냈습니다. 주님 오실 길을 준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라는 명령과 하나님께서 골짜기와 언덕과 산들을 평탄하게 하시는 일을 책임지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지극히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누가복음 3:1-6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