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인 파루시아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가짜 뉴스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요약하면 2장의 처음 다섯 구절들의 목적은 교회를 위로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아닙니다. 아직 예수님은 다시 오시지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재림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당신이 당하는 고통은 당신이 뒤에 남겨졌다는 표시가 아닙니다. 우리가 나눴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이들에게 이미 침대 밑에 괴물이 있는지 확인했고 괴물은 없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부모처럼, 바울은 매우 불안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첫 번째 편지에서 그들이 죽은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걱정을 표현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제 시간은 조금 더 흘렀고 그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재림을 놓친 사람들이 아닌가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불안은 죽은 자들에게서 그들 자신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어떻게든 그들 모두가 재림을 놓쳤다는 권위 있는 말을 받았고 그 “선생님”은 그 메시지가 바울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내용을 선포하지 않았으며 그런 선포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습니다. 사실, 그는 전체 상황에 약간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이미 재림하셨다는 이 생각이 어떻게 지역 사회에 자리 잡고 그러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는지에 대해 세 가지 다른 방법을 제시합니다. 바울은 그러한 소동의 원인이 누군가가 말한 예언 때문인지, 가르침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과 동료 선교사들이 보낸 위조된 편지 때문인지 궁금해 합니다. 비록 그 이야기의 근원을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이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짜 뉴스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공동체는 영을 시험하고 분별하는 일을 더 잘 했어야 했습니다. 바울이 그들과 함께 있을 때 그들에게 설명한 것의 핵심 요소, 즉 “불법의 사람”의 출현과 역사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여기에서 무엇(또는 누구)을 말하는지 해독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첫째, 이 특별한 편지는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불안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자 쓴 글입니다. 둘째, 신약성경의 어떤 편지에서도 바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셋째, Lectionary의 오늘 본문은 불법의 사람에 대해 논의하는 대부분의 구절을 건너뛰고 예수 그리스도의 적극적인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6-12절의 내용을 탐구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고 싶다면 벤 위더링턴 3세의 지도를 받아 “불법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어떻게 대조되는지 탐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바울이 불법의 사람에 대해 선언한 사실, 즉 그는 멸망을 받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할 가치가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좌절케한 상황을 생각하면서도, 악한 자의 모든 시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승리하셨다는 진리를 가지고 교회를 위로하려고 노력합니다.
게다가 설교는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문제를 혼동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썼습니다. 바울은 파루시아가 일어나지 않은 이유(불법의 사람에 관한 모든 내용)를 설명하기 전에, 1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을 짝을 지어 매우 절제된 방식으로 크고 중요한 신학적 진술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데살로니가 교회와 우리 시대와 도시의 교회들은 수동적으로 모이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우리를 모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찾으러 갈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귀찮게 다시 반복해서 말하지 않았지만 저는 다시 말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으신다고 하셨다면, 우리를 지금 모으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이 재림하시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까? 다른 것이 아니라면, 그 말은 남겨지는 일에 대한 대부분 사람들이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덜어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다 행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 재림을 놓칠 수 없습니다.
13절에서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로하는 방식은 그들의 주의를 하나님의 활동에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고, 성령의 성결케 하시는 역사를 계속 받고 있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그의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서, 그들을 부르신 분은 (혹은 우리를 모으실 분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예수님의 영광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 영광이 온전히 알려질 것임을 압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로새서 3:4)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행하셨다면, 여러분을 뒤에 남겨 두시겠습니까? 그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겨두고 떠나시겠습니까? 그가 구원하신 사람들을 뒤에 남겨 두시겠습니까? 그가 지금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뒤에 남겨 두시겠습니까? 그분께서 진리에 대한 지식으로 자라나는 사람들을 뒤에 남겨 두시겠습까? 그가 그분의 첫 열매를 뒤에 남겨 두시겠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바울은 그렇게 깊은 위로를 한 후에, 그들에게 다시 혼란에 빠지거나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할 일에 대해 부드럽게 안내합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에게서 듣고 읽은 가르침에 충실하십시오.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소문과 거짓 이야기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할 때 공동체가 굳건히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전통과 가르침입니다. 가짜 뉴스에 대한 최선의 방어는 진리, 즉 그들의 구원에 대한 지식에서 흘러 나오는 진리(12절)에 뿌리를 두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우리는 시편 62편을 바탕으로 한 Wendell Kimbrough의 찬송을 불렀습니다. 굳게 서서 굳게 잡으라는 바울의 명령은 “나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후렴구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나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내 모든 희망은 그분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나는 그분의 변함없는 사랑을 기다리며 신뢰합니다.
자신이 뒤에 남겨진 것에 대해 무척 걱정하면서 모든 것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그 후렴구로 충분할까요? 우리 교회 공동체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꽤 섞여 있기 때문에 올바르지 않은 종말 신학이 주는 영향을 상상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저희 신앙 공동체 내에서 한 명 이상의 사람이 세대주의가 주는 두려움이 신앙에 미치는 반복적인 영향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트라우마를 푸는 것은 힘든 싸움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을 신뢰하고, 더욱이 우리가 아는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을 신뢰하라는 바울의 권고는 저를 격려해 주고, 두려움 속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제가 어떻게 격려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축복 기도에서 바울의 단어 선택은 참으로 성령의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놓쳤다는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 찬 공동체에게 바울은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축복합니다. 영원한 위로 말입니다.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위로입니다.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위로입니다. 그것이 바로 위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희망입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며, 여전히 예수님의 재림을 포함하는 미래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들이 지치기 시작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교회 공동체를 부드럽게 인도한 것처럼, 그는 이 단락을 닫는 기도를 통해 그들이 어디에 그들의 주의를 집중해야 하는지 그들 앞에 지혜롭게 제시합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아버지께 영원한 위로와 소망의 축복을 간구한 후 두려움과 근심으로 그들을 사로잡은 저주를 깨고자 행동하고 말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바울은 영원한 위로의 복을 그들의 선행과 행위를 통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역사와 연결시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일에 계속 바쁘게 살다 보면 앞으로 올 일과 재림이 언제 올지 걱정할 시간이 없을 것이라고 그가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가 그들이 걱정을 멈추고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대부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을 체험함으로써 범사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므로 굳건한 믿음은 남에게 보이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더 나은 것은 무엇입니까? 두려움 속에서 사는 것입니까? 아니면 신뢰 속에서 사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실제로 하실 것을 신뢰하며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낫습니까? 악한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영원한 위로과 좋은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 대안은 우리로 하여금 절망하고 의문을 품고 하나님 나라의 선을 행하는 데 비활동적이고 무능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는우리가 “안이나 밖”에 있는지 혹은 하나님에 의해 뒤에 버려졌는지 질문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버리셨다는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중요한 주제에 대해 교회에 편지를 쓰는 동안에도 그가 얼마나 많은 제약을 받았는지 놀랍습니다. 그는 좌절할 만한 어려운 상황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지고 있던 주된 목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진리로 그들을 위로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자신이 그 은혜로 살고 죽었습니다. 저는 “I’ll Not Be Shaken”이라는 찬송을 다시 생각합니다: “나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내 모든 희망은 그분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나는 그분의 변함없는 사랑을 기다리며 신뢰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5, 13-17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