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할 일 많은 세상으로 보내시며 그들이 경험하게 될 일들에 관해 말씀하신 긴 단락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마태복음 9:35–10:8 참조).
저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신다는 점이 조금 의아합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제자들보다 그들을 맞이할 공동체가 들어야 할 내용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말씀은 제자들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먼저, 이 말씀은 제자들이 사람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겪게 될 고난과 도전, 사역의 성과와 경험에서 시선을 돌려, 그들의 부르심의 궁극적 목적을 하나님께 다시 두도록 이끌어 줍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라고 약속하십니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하는 선교와 구제, 섬김의 사역은 단순한 활동이 아니라 초대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가 섬기는 이들 모두를 향한 초대, 곧 하나님의 임재와 연결되어 하나님을 우리의 삶과 상황 가운데 모셔 들임으로써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하는 초대입니다. 제자들은 비록 완전하지 않고 때로는 흔들리기도 했지만, 예수께서 그들의 삶을 인도하시도록 그분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그들이 말과 행동으로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를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공동체 가운데서 신뢰할 만한 존재로 서게 될 것이며, 동시에 다른 이들이 하나님을 다시 자기 삶에 모셔 들일 수 있도록 돕는 살아 있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디다케』, 곧 “열두 사도를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전해진 주의 가르침”은 시리아 또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2세기 초 기독교 공동체에서 나온 문서입니다. 이 문서는 특히 본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공동체가 어떻게 실제로 실천할 수 있는지 안내합니다. 곧 사도나 순회하는 교사들, 그리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영접하고 대해야 하는지 가르치는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보냄 받은 최초의 사도들의 증언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디다케』의 모든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선언에서 시작됩니다. “두 길이 있으니, 하나는 생명의 길이요 하나는 죽음의 길이다. 그러나 두 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생명의 길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장 큰 계명 위에 세워집니다. 또한 “네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다른 이에게 행하지 말라”는 원리가 포함됩니다. 이 생명의 길에는 관대함, 환대, 그리고 노동의 책임을 감당하는 삶 등이 따릅니다.
반면 죽음의 길은 이와 정반대로 악한 길입니다. 온유함과 인내가 없고, 헛된 것을 사랑하며, 복수를 추구하고, 가난한 이를 돌보지 않으며, 고통받는 자들을 섬기지 않고,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삶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어린아이를 살해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파괴하는 자들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자를 외면하고, 핍박받는 이에게는 고통을 더하면서 부자의 편을 들고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는 무법을 행하는 재판관들입니다. 다시 말해, 그 길은 탐욕과 이기심, 그리고 게으름이 특징인 파멸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으로 온 선지자나 교사, 사도를 분별하는 기준은 그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의 삶입니다. 『디다케』는 그들의 가르침을 듣고, 복음서의 가르침에 따라 주께 보냄 받은 자처럼 영접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이 거짓으로 드러난다면, 그들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몇 가지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도는 주님처럼 영접하되, 하루만 머물게 해야 합니다. 필요할 경우 이틀까지는 허용되지만, 사흘 동안 머문다면 거짓 선지자로 보아야 합니다 … 성령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해서 모두 참된 선지자는 아니며, 오직 주의 길을 따르는 이만이 참된 선지자입니다. 그러므로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는 그들의 삶으로 드러납니다. 진리를 가르치면서도 정작 그대로 행하지 않는 자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성령을 빙자하여 돈이나 물질을 요구한다면 그 말을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려운 이들을 위해 나눔을 요청할 때는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학자들은 이러한 ‘행동으로 드러나는 인격’에 대한 강조가 초기 기독교 공동체 형성기에 특히 중요했다고 봅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제도화된 교회 구조나 확립된 정경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신약 서신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환대의 정신을 지키며 주의 백성이 주께서 보내신 자들을 영접할 것이라는 약속의 증인으로 살아가면서 동시에 이를 악용하려는 이들을 분별하는 일이 새로운 과제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온유함은 순진함과 다릅니다. 자기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라는 다양한 초대들 사이에서 분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이 누구를 삶의 중심에 모시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를 영접하였다면, 그의 삶은 의의 열매로 나타날 것이며,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삶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본문의 요점
“선지자의 상”과 “의인의 상”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어떤 외적인 보상이라기보다, 그들이 받은 부르심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는 이 예수님의 약속에 관한 많은 주석가들의 해석을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추수의 사역에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너희가 하는 일을 영접하는 사람은 너희를 보낸 나를 영접하는 것이며, 내가 하는 일을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영접하는 것은 곧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되는 것과도 같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 또한 누군가를 돕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다. 이 일은 크고 중요하지만, 그것에 압도될 필요는 없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라. 예를 들어, 목마른 이에게 시원한 물 한 잔을 주어라. 가장 작은 나눔이나 대접도 참된 제자의 삶을 이루며, 절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예화 아이디어
어느 평범한 주일에, 우리 교회 성도들과는 매우 다른 분위기의 사람들이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쇼파르(양각 나팔)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배 후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페리 선박에서 내린 뒤 성령께 자신들이 가야 할 교회로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때 저는 밴쿠버섬의 한 도시에 살고 있었고 이 사람들은 서핑하기 위해 섬 반대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페리 터미널 근처의 한 교회 주차장에서 기도했다가, 그곳이 아니라는 마음이 들어 다시 길을 떠났고,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날 아침 우리 교회로 인도하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저희 예배에 참석하였고, 그날 예배 후에는 평소처럼 기도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누구든지 기도가 필요하면 기도를 받으러 예배당 앞쪽으로 나오는 시간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공동체에 종종 드나들던 한 분이 있었는데, 속한 모든 공동체에서 겉돌던 그분은 자주 기도를 받으러 오시던 분이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우리 기도팀은 그분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무엇인가 충분히 닿지 않는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소통이 부족해서 그분이 정말 원하고 바라는 바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껴왔었습니다.
그때 그 쇼파르를 가진 분들이 기도 시간에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보며, 이 사람에게 사역하기 위해 그 자리에 나아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 기도팀은 물러서서 그들이 그분을 축복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그를 들어 올려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그분이 그렇게 평안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이전에는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기도자들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어떠한 의도도 드러내지 않았으며, 특별한 대우를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성령을 따라 지친 한 영혼에 사랑을 전하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곧 예배당은 비워졌고, 모두가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그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영접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 공동체의 한 지체가 “선지자의 상”을 누리게 되었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10:40-42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