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비유가 날카로운 비판이었다고 느꼈다면, 이번 비유는 우리를 한층 더 불편하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 지도자들을 향한 공개적인 발언을 이어가시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야 할 이들이 보여준 불순종과 배척을 비판하십니다. 그런 다음, 그들에게 임하게 될 준엄한 심판을 예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야기를 시작하시면서 먼저 배경을 설정하십니다. 여기 아주 훌륭한 집주인 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래 ‘본문 요점’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그는 자신의 땅에서 거주하며 일하는 소작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세심하게 챙겨줍니다. 악덕 집주인과 거리가 먼 그는 자신의 땅을 누구나 기꺼이 임대료를 지급할 만한 가치 있는 토지로 만들었으며, 그 일을 제대로 해 냈다는 확신을 가지고 나라를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간과한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소작인들의 신원을 미리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수확한 농작물로 소작료를 지급해야 할 시기가 되자, 그들은 집주인의 하인들에게 비열하게 굴며 탐욕스러운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마치 조직폭력배처럼 굴며 찾아온 하인들을 폭행하고, 상해를 입히며, 끝내 살해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집주인에게 소작료를 지급하지 않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그런데도 집주인은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며 물러서지 않고 더 많은 종을 보내지만, 그들 역시 똑같은 수모를 당하고 맙니다. 마침내, 그는 소작인들이 악하더라도 문화적인 금기까지는 어기지는 않으리라 믿고 자기 아들을 보냅니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결과는 그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소작인들은 탐욕에 눈이 멀어 옳은 선택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들이 나타나자 자신들의 소유도 아닌 그 땅의 상속권을 완전히 끊어버릴 기회로 여긴 것입니다. 그들은 전에 집주인의 하인들을 죽였던 것처럼, 그의 아들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하신 후, 성전 지도자들의 생각을 물으셨습니다. 그 당시의 관습과 가치관을 고려할 때, 이 집주인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처벌하고 다른 사람들로 교체해야지요!” 지도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들에 대한 비난에 동의합니다. 보십시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 극적인 이야기에 푹 빠져 버렸습니다. 그들은 이미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자기들이 불순종으로 인해 정죄를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 버렸습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패를 얼마나 낱낱이 꿰뚫어 보고 계시는지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이미지를 뒤로하고, 성경에 나오는 건축자의 비유로 시선을 돌리십니다. 소작인들이 집주인의 하인을 배척했던 것처럼, 성전 지도자들도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뜻과 지혜에 따라) 올바르게 돌보고 이끌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돌’들을 거부했습니다. 이는 과거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으며, 동시대의 세례 요한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보내심을 받았지만, 그들은 그분 또한 거부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비극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을 거스르는 일이 우리를 회개로 이끌 수 있지만, 우리가 늘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집주인이 보낸 하인들을 대적했던 소작인들처럼, 때로는 자신의 죄악 된 습관을 고집하며 그 안으로 더 깊이 빠져들곤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삶의 방식이 결국 파멸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데일 브루너의 말처럼, 우리는 “오늘은 산산조각 나는 추락으로, 내일은 가루처럼 으스러지는 심판으로” 인해 파멸될 것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모퉁이 돌을 세우심으로써 이 상황을 바로잡으시는 모습을 지켜볼 때, 그들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그 놀라움이 두려움과 전율일까요, 아니면, 경외와 찬탄일까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놀라는 이유가 결코 인간의 손과 지혜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을 목격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선하신 섭리의 하나님께서 이 일을 어떻게 이루실까요? 마치 집주인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고, 선지자들과 예수 그리스도, 성령을 사자로 보내십니다. 집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바라시는 수확물은 우리의 순종의 열매, 곧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새로운 삶과 정체성, 공동체가 세워질 모퉁이 돌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성전 지도자들에게, 수수께끼 같으면서도 거침없는 태도로, 그들의 시대는 끝났고, 그들의 지배 체제는 무너졌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새로운 길이 열렸음을 선언하십니다. (본문 45절과 46절에서 마태는 그들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알아들었지만, 군중들이 예수님 편이었기 때문에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고 묘사합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예수님이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신 약속의 말씀을 이 비유와 연관 지어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짚어 봅니다. 그렇다면 이 장면 역시 예수님이 기존 질서를 해체하고, 권력자들이나 기득권층보다 더 큰 믿음의 열매를 맺는 이방인과 소외된 자들을 환영하시는 또 다른 사례로 볼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지도자들에게 원하기만 한다면 손가락질받던 죄인들의 뒤를 따라서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고 믿으며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살아갈 기회와 초대가 그들 앞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벌어질 일들을 경고하십니다. 하늘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이 서로를 배척하는 일로 이어지고, 그 일은 결국 파멸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어떤 메시지를 거부하고 있습니까? 성경의 어떤 부분을 회피하거나, 잘못 해석하거나, 혹은 자의적으로 해석하려 하고 있습니까? 탐욕스러운 우리 마음에 너무 큰 대가로 느껴지는 순종의 부르심이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우리들 각자의 삶과 신앙 공동체를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퉁이 돌 위에 세우고 있습니까? 아니면, 마치 우리 자신이 권위자인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어떤 체계나 사고방식 위에 우리의 삶을 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고 있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설령 그들이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어떻게 그들에게 배울 수 있겠습니까?
본문 요점
본문 33절에 많은 동사가 등장합니다. 모두 8개입니다. 그중 한 동사는 비유를 소개하고, 나머지 동사들은 모두 집주인을 묘사합니다. 그 집주인이 얼마나 세심하게 포도원을 준비했는지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포도나무가 심긴 포도원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짐승들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울타리와 포도를 가공할 수 있게 파 놓은 포도즙 틀과 사람들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망대까지 갖추어 놓았습니다. 이처럼 도입부 문장에 쓰인 동사의 절반이 집주인의 은혜로운 돌봄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이야기에서 누가 선한 존재인지를 금방 알게 합니다.
예화 아이디어
캐나다 전역에서 진행되는 원주민 기숙학교 철거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정의의 심판을 떠올리게 합니다. 주로 종교 단체가 운영했던 이 시설들의 철거는, 스스로 ‘누구보다 잘 안다’라고 자부하면서도 실상은 그리스도의 길을 거슬렀던 자들에게서 주도권을 거두어 열매 맺는 이들에게 넘겨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존자들과 원주민 공동체들은 학교가 있던 자리에 주로 추모 시설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로어포스트의 사례처럼, 폭력의 상흔이었던 학교 건물이 철거되면서 마을 다른 곳에 주민센터가 건립되기도 합니다. 새로운 모통이 돌을 놓듯, 새로운 만남의 공간이 세워집니다. 이러한 흐름은 실로 종말론적입니다.
마태복음 21:33-46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