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를 가르치셨을 때, 자신의 생애 중 이 때를 생각하고 계셨을까요? 우리는 매년 사순절을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고, 그곳에서 마귀에게 철저히 시험과 유혹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시작합니다. 사순절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경험을 하셨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의 희생의 여정에 동참하도록 우리 모두를 초대합니다. 우리는 매 순간 우리의 실패와 마주하지만,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또한 우리에게 예수님이 광야에서 직면하신 것과 비슷한 상황으로 이끌리게 되지 않기를 간구하도록 가르치는 듯 합니다. 그 경험이 완전한 인간이시자 완전한 하나님이신 분에게조차 얼마나 어려웠을 지 생각할 때, 우리는 숙연해집니다. 또한 주기도문의 이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인간 본성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계시는 지에 대한 확실한 증거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사실 우리를 위한 자비의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유혹들을 이겨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이러한 유혹들은 인간의 중요한 욕구 또는 두려움과 관련된 것들로서 우리가 매일 여러 형태로 마주하는 것들입니다. 이 유혹들은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과 단절될 때 상황이 얼마나 잘못될 수 있는지 드러냅니다.
물론 우리가 실제로 굶주린 상태는 아닐 수 있고, 또한 우리에게 기적적인 방법으로 돌을 빵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고난에서 쉽게 빠져나가고자 하는 인간적인 마음과 즉각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욕구가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 우리는 어떤 대상이 실제로 유익하거나 우리에게 필요한가를 분별하는 것보다 손쉬운 문제 해결에 더 큰 매력을 느낍니다. 사실 우리는 그 과정을 너무나도 많이 생략해 버려서 종종 ‘원하는 것’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혼동합니다. 그리고 이기적인 생각에 빠져 매일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곤 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결핍된 듯한 세상, 곧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은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의심하려는 유혹으로 인해 하나님께 그 사랑을 계속해서 증명해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 기적을 보이면 메시아이신 것을 믿겠다며 계속해서 기적을 요구했던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시험하려는 이 시도는 결코 우리를 만족시켜주지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요구가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우리의 성향과 결합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오직 우리의 구원자이자 문제 해결자로만 이해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우주적 사명이 우리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여 우리가 사랑 받고 있다는 (또는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게 하는 것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사십 일 금식이 성령께서 그분을 광야로 이끄신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시간은 고독과 단순함, 침묵, 그리고 아마도 기도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 모든 것이 사라지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지는 시간, 그 메시지가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가 되어 우리를 인도해주는 그런 시간 말입니다.
(제가 상상하기로는) 마귀가 예수님을 넘어뜨리는 데 실패한 것에 분노하여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던진 유혹이 “영혼을 자기에게 팔라”는 것이었습니다. 사탄은 이때 절박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자기 자신을 투영하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은 때로 마귀를 “이 세상의 신”으로 묘사하지만 (고후 4:4), 우리는 이 호칭이 제한적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는 세상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는 예배라는 충성의 대가로 세상을 예수님에게 “주려고” 시도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기의 불행에 동참하게 하려던 것일까요, 아니면 실제로 이 전략이 통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인간의 본성을 이용하려는 이 마지막 유혹이 왜 마귀가 숨기고 있던 마지막 비장의 카드였습니까? 아마도 이 유혹은 소속감과 안정감에 대한 갈망이 타인을 지배하려는 권력에 대한 갈망과 뒤섞인 결과이고, 두려움과 낮은 자존감, 이기심이 기회주의와 즉각적인 해결을 바라는 마음과 혼합된 위험한 조합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는 걸 알지만, 우리는 그 가능성을 시험해 보곤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목이 잘린 닭처럼 뛰어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가능한 모든 사소한 영역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혹을 이겨낼 가능성은 크지 않습니다. 오히려 희박한 정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보호를 구하는 기도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물론, 이 기도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나라의 길에 헌신하고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도록 가르칩니다. 다시 말해, 이 기도는 단지 우주적 구원자를 찾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의 연단 속에서 형성된 세상에 대한 교훈과 하나님의 경험을 가지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주를 쫓는 제자의 모습으로 진정으로 변화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길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자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린 직후에 그 사랑하는 자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악한 자의 유혹에 저항하는 길을 보여주기 위해 광야로 보내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의 장소를 우리가 버림 받은 공간과 시간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라는 사실을 불신하고 의심하게 만드는 악한 자의 유혹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이 거짓말은 사실 마귀가 우리를 유혹에 굴복시키는 매우 성공적인 방법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잊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에서 밀어내고,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선하고 온전한 뜻을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계시며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도록 도우셨던 것처럼,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어려운 일들 가운데서 우리를 도와 주시고, 보호하시고, 붙들어주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신 성령님과 함께, 그리고 그분으로 인해, 우리는 감히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중독과 거짓된 불안감, 이기적인 야망과 헛된 자만심을 극복할 수 있고, 우리가 단지 인간에 불과하다고 믿게 하는 마귀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하는 마귀의 시험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신 바로 그 능력이 그분으로 하여금 모든 시련을 견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안에도 그 동일한 능력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아멘.
본문 요점
이번 주 본문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예수님의 삶의 또 다른 순간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막아 서면서 생각을 바꾸라고 말했던 때입니다 (마 16:20-23).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하신 말씀과 비슷하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도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귀만 유혹하는 존재가 아닌 것 같네요! 세상에.
예화 아이디어
많은 영화와 TV 프로그램이 수년 동안 우리를 웃기려고 사용했던 것처럼 정말 우리 양쪽 어깨 위에 악마와 천사가 한 마리씩 앉아 있을까요? 저는 등장인물이 선한 일을 하려고 고민했기 때문에 일련의 유혹과 변명이 밀려온 장면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4:1-11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