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9:9-13,18-26 주석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미래를 새롭게 써 내려가는 중대한 변화를 경험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스스로 깨달았든 그렇지 못했든, 모두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한결같이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이 참되며 능력 있다는 사실을 붙잡고 단순한 믿음으로 행동에 나섭니다.

먼저 세리 마태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마태는 훗날 복음서를 기록할 인물이며, 성령께서는 그의 소명 이야기를 성경에 반드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9절 단 한 절에 그의 부르심이 기록되어 있지만, 마태가 일어나 예수님을 따른 이후 그의 삶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마태는 자신의 필요를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을까요? 예수님을 즉시 따랐던 그의 간절함은,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여 얻은 부에 관해 마음이 불편했거나 자신의 선택한 인생길에 불안해하고 있었다는 방증일까요? 아니면 제자로서 순종의 긴 여정을 걸어가고 나서야 비로소 과거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공허했는지 깨닫게 된 것일까요? 어쩌면 예수님의 부르심이, 유대 종교 공동체 안에서 자격이 없다며 배제당했던 어린 시절의 상처를 채워준 것은 아닐까요? 마태가 정말로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다면, 이미 다른 랍비의 제자가 되었을 테니 말입니다. 우리는 마태를 움직인 속마음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동기가 그를 어떤 행동으로 이끌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만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동기와 행동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바리새인들의 비난이 이를 잘 보여 줍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그들 스승의 행동을 해명하라고 요구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직접 나서서 답변하십니다. 12절에서 예수님은 당시의 격언(혹은 그 일부)을 인용하시며, 자신이 병든 자들을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희생 제사의 방식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계심을 암시하십니다. 이제 제사는 단순히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행위에 머무르지 않고,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삶을 통해 비로소 온전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자비의 삶으로 부르실 때, 죄인들은 새로운 순종의 삶으로 인도되며, 그 결과 공동체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풍성한 샬롬이 세상에 나타나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종종 그래왔듯, 구약에 규정된 동물과 곡식 제사라는 비교적 쉬운 종교적 의식에만 치중한 나머지, 서로를 돌보라는 율법의 요구에는 소홀해졌습니다.)

마태의 서사 방식은 시간의 흐름을 항상 명확하게 보여 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18절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여전히 세리의 집 잔치 자리에 있는지, 아니면 새로운 장면으로 전환된 것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두 장면이 이루는 강렬한 대비는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멸시받던 세리들 한가운데 계시다가, 이제는 회당의 존경받는 지도자가 찾아와 죽음을 되돌려 달라며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도움을 요청하는 자리로 나아가십니다.

누가복음에서 “야이로”라고 부르는 이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손을 얹으시기만 해도 죽음을 되돌릴 수 있다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반응과, 앞서 마태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던 모습이 평행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마태가 그랬듯, 예수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 앞에 놓인 부르심을 따라 길을 나서십니다. 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를 상기시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바로 그 삶의 방식을 스스로 몸소 실천하시는 지도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먼저 가지 않은 길로 우리를 부르지 않으시며, 자신이 친히 행하지 않을 일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을 따라 죽은 딸에게로 가시는 길에, 또 다른 도움이 필요한 여인이 뒤에서 다가옵니다. 지위와 권위가 있어 공동체 안에서 당당히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었던 야이로와 달리, 이 여인은 부정하고 소외된 존재입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온 그녀는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정결법에 따라 종교적으로도 위험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회당장과 다름없는 믿음을 품고 예수님의 능력을 신뢰하며, 그분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자신의 미래가 바뀔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치유하십니다. 이 회복의 사건은 그녀의 삶의 모든 영역을 완전히 변화시킵니다.

이후 예수님은 죽음이 지배하고 있는 집 밖에 모여 있던 군중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본질적으로 예수님은 그들이 보고 있는 현실이 참된 현실이 아니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말을 비웃던 사람들 앞에서 약속하신 참된 현실을 이루어 가십니다. 회당장이 믿었던 그대로, 예수님은 죽은 아이의 몸에 손을 대시고 그녀를 다시 살려내십니다. 혈루증 여인처럼, 이 아이의 삶도 회복되어, 이제 새롭게 써 내려갈 인생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 짧은 본문 안에는 소명의 대전환과 회복, 그리고 부활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멸시받던 죄인과 부정한 여인, 죽은 아이와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까지, 서로 너무나 다른 처지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자비를 입습니다. 이들은 모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병들어 있거나 죄에 묶여 있었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치유와 온전함을 경험합니다.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단순한 믿음과 그에 따른 행동이 있었고, 그 결과 생명과 회복, 그리고 삶의 목적을 향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립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그들의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은혜가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본문 관찰 포인트

헬라어 감탄사 “이두”(idou, “보라!”, “주목하라!”)는 이 본문에서 두 번 등장하는데, 두 번 모두 예수님 곁에 있는 인물들에게 독자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10절에서는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잔치를 벌이는 장면에 쓰였습니다. 예수님의 지위를 생각하면 매우 부적절해 보이는 장면이지만, 예수님은 그 자리에 함께하십니다. 18절에서는 이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인물인 회당장이 등장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 그는 믿음으로 나아와 기적을 요청합니다. 예수님은 이 두 부류의 사람 모두를 위해 오셨음을 몸소 보여 주시며, 이로써 자신은 병든 자와 죄인을 위해 왔으며 사랑의 자비로 그들을 치유하신다는 선언, 즉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맞서 선포하셨던 그 말씀을 삶으로 친히 증명해 보이십니다.

반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등장에는 “이두”가 쓰이지 않습니다. 이는 그녀가 대중 앞에 당당히 나서서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다가와 옷자락만 만지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누구의 주목도 받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를 그대로 어둠 속에 머물러 있게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사랑과 치유의 빛 한가운데로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그녀의 믿음이 이 치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선포하십니다. 이 믿음은 회당장을 예수님께로 이끌었던 바로 그 믿음과 같은 믿음이었습니다.

예화 아이디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의 삶에 얼마나 큰 변화를 불러왔는지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15세기의 한 기도서에 실린 성화는 마태의 삶에 일어난 이 변화를 잘 보여 줍니다. 이 본문을 다룬 시각 주석의 해설에 따르면, 그 그림은 마태의 두 삶—세리였던 과거의 삶과 복음 전도자이자 교회의 섬기는 종으로 변화된 이후의 삶—을 나란히 대비하여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다른 두 치유 사건 역시 인물들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뒤바꿔 놓았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 여인과 소녀가 그 뒤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지 못하지만, 치유받기 전 그들의 삶(혹은 죽음)이 어떠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그들의 삶은 다시 열렸고, 새로운 미래를 향한 실질적인 가능성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삶에 깊은 불만족과 불안을 느끼는 이들, 무언가 결핍되어 필요를 느끼는 이들, 심지어 삶의 권태에 빠진 이들에게, 이 치유의 이야기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의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