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1-10 주석

매년 부활절 후 네 번째 주일이 되면 교회력성구집에 따라 우리는 선한 목자 이야기와 관련된 본문을 읽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 주 본문인 7-10절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나는 ~이다”라는 말씀이 사실 문(door, gate)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양 우리 안에 있는 우리에게 가장 큰 과제는 무엇일까요? 혹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문이시면서 동시에 위대한 목자이심을 잊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목자의 음성을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도둑이나 강도의 목소리와 혼동하여 그들이 우리 가운데 활개 치도록 내버려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도둑과 강도를 구원자와 구분해 내는 일이 생각만큼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 한 뉴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타임쉐어 상품에 속아 넘어간 사람들이 계약 해지를 대행해 주겠다는 회사에 또다시 이용당하는 과정을 다루었습니다. 이 고객들은 예약 불가 등 온갖 핑계 때문에 정작 이용해 보지도 못한 휴가 비용으로 수천 달러를 지급해야 했습니다. 판매원들은 “열심히 일한 당신, 쉴 자격이 있다”며 설득했고 (물론 맞는 말이지요), 사실상 선택권이 없는 상황 속에서 타임쉐어를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다며 구매를 유도했습니다. 결국 판매원들은 고객의 선의를 이용하여 그들의 절실한 필요와 욕구를 악용하고 속였습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저 물건을 훔치러 온 도둑과 다름없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의 세상 속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교회 안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구별하는 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방식을 따라 “문”을 통해 들어온 이가 누구인지 분별하는 일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매우 큰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인종차별, 민족주의, 성별 및 성적 지향, 팬데믹 대응 등의 문제에 있어서, 과연 누가 하나님의 성품을 품고 그분의 뜻에 따라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까?

선한 목자에 관한 거의 모든 주석은 오늘날에도 중동의 목자들이 여러 양 떼가 섞여 있는 우리 안에서 자기 양들을 불러낼 때 목소리나 특정한 소리를 사용한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 양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라온다고 말씀하신 비유는 매우 적절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목자의 목소리나 소리를 “알아듣는 것”이며, 이는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더불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는 삶이 체득될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 된 공동체 안에서 성령과 더불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일구어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음성과 우리를 죽이고 훔치고 멸망시키러 오는 자들의 목소리를 즉각 분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분의 음성을 모르면, 우리는 강도들의 말에 귀를 내어주게 될 것입니다.

생명으로, 더 풍성한 생명으로 가는 길은 오직 문이신 그리스도를 통하는 길뿐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문이 되실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와 보호를 누립니다. 우리는 안전하게 안식할 수 있고, 세상으로 나아가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넘나드는 문턱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이 우리 곁에, 우리 앞뒤에, 우리 위아래에, 그리고 우리 삶의 모든 곳에 항상 함께하시며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자이자 문이신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씀하시며, 그 자체로 풍성한 삶이 되는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도둑과 강도들은 제법 그럴싸하게 말할 수 있고, 심지어 우리 내면의 감정과 욕망에 호소해 그것이 마치 옳은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자기중심성은 결국 주변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 파멸로 몰아넣는 위험한 본색을 드러내고야 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음성과 길과 뜻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과 공동체의 양들을 많은 고통과 슬픔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세상의 담론 속에서 요란한 목소리들과 그 혼돈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반드시 구별해내야 합니다. 우리는 메시지와 메신저가 맺는 진정한 열매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담장을 넘어 몰래 들어가려는 사람은 열매가 적을 수밖에 없지만,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문으로 들어오는 이는 하나님의 영광과 성령의 열매를 가득 머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알고 그 지식 안에서 성장하는 일은 기도와 말씀, 분별력 있는 공동체 안에서의 교제, 그리고 희생적인 사랑의 용기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부단히 연습할 때 가능해집니다.

문맥적 관점

이 담론의 문맥을 살펴보면, 이 본문이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의 치유 사건, 그리고 예수님, 치유받은 사람, 그리고 바리새인들 사이의 “본다는 것”에 관한 대화로부터 곧장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전형적인 구성 방식인 “표적 – 대화 – 담론”의 순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비록 인간의 감각은 “보는 것”에서 “듣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예수님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같습니다. 바로 “누가 진정 나를 아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앎’이라는 주제는, 복음서 본문을 따라오셨다면 아시겠지만, 이번 부활절 절기 본문들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마블 코믹스와 영화 시리즈에서 아홉 개의 세계는 비프로스트 다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다리는 각 세계를 오갈 수 있는 통로이자 문입니다. 아스가르드의 문지기 헤임달은 이곳을 지키며 다른 세계로의 출입을 통제하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아스가르드를 보호합니다. 헤임달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누구의 명령에 복종해야 할지, 즉 누구의 “목소리”를 따를 것인지 분별하는 일입니다. 만약 아스가르드의 새로운 왕이 악한 왕이라면, 헤임달은 왕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자신의 형식적인 의무를 지킬 것인지, 아니면 왕에게 불복종하더라도 왕국의 안녕을 진심으로 바라는 이의 지혜를 따를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자신을 교회의 문지기로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자만심에 사로잡혀, 우리는 정작 자신을 부인하고 위대한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곤 합니다. 참된 문이신 주님의 성품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진짜 사명인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