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을 지난주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에서 분리해 살펴보면, 삼위 하나님 중 어느 위격이 우리와 함께하시든 상관없이, 우리 곁에 꼭 붙어 계시는(bonded)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에 집중하게 됩니다. 우리를 그분과 잇는 끈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연합하여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계명을 지킬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아버지께 구해주십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께서 사랑의 결속 안에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바로 진리의 영이신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묶여 있다는 사실을 부정적인 측면을 통해 설명하시는데, 이는 그 이면에 있는 긍정적인 진리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사랑을 안다는 것은 곧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이며,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을 받게 됨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안다”는 말은 “믿는다”는 말의 동의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고의로, 그리고 비참하게 하나님을 거부하기로 선택하여 그분을 알지 못하게 된 자들과 제자들을 대조하시며, 세상은 성령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 영”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헬라어에서 “영”을 가리키는 단어는 중성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명령을 지키며 예수님처럼 사는 삶을 통해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아는 것처럼, 우리는 진리를 따르는 삶을 통해 성령을 알게 됩니다. 다른 이들이 이 진리를 자기의 방식이나 계획, 욕구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부정하지만, 우리는 그 진리가 참되다는 것을 마음 깊이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또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17절).
17절의 “너희”는 두 번 모두 복수형입니다 (사실 이 본문 전체에서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을 개인에 국한하거나 포스트모던적 의미의 진리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여전히 성령 하나님의 진리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모든 계명의 요약으로 제시하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바로 그 진리입니다.
세상이 이런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는 세상이 추구하는 자기중심적 야망과 헛된 교만을 뒷받침하는 사랑과 완전히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설교 해설을 쓰던 주간에, 저는 기독교 대학원생들과 함께 1930년대 초 독일의 “독일 기독교인(Deutsche Christen)” 운동 선전 자료를 읽고 있었습니다. 나치에 장악된 당시 독일 교회는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왜곡하여, “민족은 무능하고 열등한 자들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며 “단순한 자비는 자선에 불과하며, 이는 민족을 나약하게 만든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곤경에 처한 자들에게 ‘사랑의 부드러움’을 보이는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감사하지 않는 행위라고 했습니다(‘독일 기독교인’ 신앙운동 원리 제8항). 만약 세상이 이처럼 하나님께서 병약한 자나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이들을 돌보지 않으신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세상은 성령의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1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문자 그대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하나님의 가족 가운데 홀로 남겨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망 없이 버려지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 소망을 견고히 하기 위해,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을 대면하게 될 것이고, 성부와 성자가 서로 결속되어 있는 방식—그 거룩한 연합—을 실제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그 연합 속에 참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영원의 저편에 닿기 전 이 땅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여전히 사랑으로 그분께 연결되어 있음을 일깨워 주십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내는 사랑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또 다른 보혜사이자 삼위 하나님의 세 번째 위격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영원토록 주어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문, 목자, 빛, 길·진리·생명, 생명의 떡, 참 포도나무, 부활과 생명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이 모든 방식으로 예수님은 인류를 위해 일하시는 보혜사이셨고, 이제 성령께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동일한 일을 감당하십니다. 유진 피터슨은 보혜사를 “친구”로 번역했고, 데일 브루너는 조금 더 나아가 “참된 친구(True Friend)”로 번역했습니다.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은, 단지 하늘 아버지의 임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중보자의 역할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 약속은 바로 지금, 그리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을 통해 우리를 삼위 하나님과 연결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자유의 삶을 살 때, 우리는 이 약속이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이미, 그리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17절).
본문 주해
요한은 성령을 가리켜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유일한 저자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처음 등장하여 14장 26절, 15장 26절, 그리고 16장 7절에 사용되었으며, 요한일서 2장 1절에서도 한 번 더 쓰였습니다. 성경 안에서 다른 용례가 없기 때문에, 이 단어를 법적·기술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어 왔습니다. 본래 파라클레토스는 피고를 변호하는 ‘대변자’를 뜻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학계의 공통된 견해는 지나치게 법적 이미지를 강조하기보다, 성령의 “보혜사” 역할을 예수님의 사역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도 어떤 의미로 삼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보적 역할을 수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미리 경고하자면, 이 예화는 결코 유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몇 년 전 저는 미국 국경에서 벌어지는 위기 상황, 즉 수천 명에달하는 “미동반 미성년자들”(unaccompanied minors)에 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헌법상 변호사 선임 권리가 이 아이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아를 포함한 많은 아동이 이민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해야 했습니다. 이 문제는 약간의 진전이 있었으나 여전히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2016년의 한 기록에 따르면, 변호사가 없던 아동의 91%가 추방된 반면, 변호사가 있던 아이들의 추방률은 22%에 불과했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고아로 남겨지지 않는 것이었고, 또한 그들을 위해 말해줄 대변자였습니다. 뉴욕의 ICARE(Immigrant Children Advocates Relief Effort)와 “안전한 통로 프로젝트”(Safe Passage Project) 같은 단체들은 이민 절차를 밟는 수많은 아동과 청소년들을 돕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고아를 돌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성령을 모신 우리가 대변과 진리라는 성령의 방식을 따라 산다는 것은 과연 어떤 삶일까요?
요한복음 14:15-21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