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 장에서 우리는 니고데모와 예수님 사이의 철학적인 대화를 엿들었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 메시지가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보게 됩니다. 사실 이 이후에 이어지는 장들을 따라가면, 우리는 예수께서 여러 형태의 단절을 경험하며 주변부에 놓인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이라는 두 집단 사이의 단절이라는 배경 속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사랑으로 자신을 하나님으로 계시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또 그 여인이 믿음에 이르고 그 믿음을 공동체와 나누는 모습을 보며,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 공동체가 결국 스스로 믿게 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수가 성에 불어오기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이야기 속에서 일어나는 단절에 대한 응답으로, 여러 차윈의 회복이 나타납니다. 사마리아 여인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있고, 그녀와 공동체 사이의 상호작용이 있으며, 제자들이 목격하는 예수님의 목적과 능력의 신비가 있고, 이 모든 이야기를 아우르는 더 큰 차원의 일치와 화해의 흐름이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예수님 시대 당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에게 품었던 멸시에 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에게 야곱이라는 공통의 조상이 있었지만, 두 민족 사이에는 개인적인 관계에까지 이르는 분명한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셨다고 묘사합니다 (많은 성경이 “그의 여행”이라고 번역하지만, 헬라어 속격의 성은 여성형으로 ‘여정’이라는 단어를 수식합니다). 예수께서는 완료 시제로 “피곤하셨다”고 표현됩니다. 이 피곤함은 지속적인 결과를 낳는 피곤함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지치시게 만든 원인이,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이 영과 진리로 함께 예배하지 못하게 막고 있던 그 분단의 선이 아니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 “피곤함” 속에서 행하신 일의 결과가, 예수께서 그의 사역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행하신 것, 즉 그의 죽음에서 절정을 이루며 모든 막힌 담을 허물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조상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께서는 유대 남자와 사마리아 여인 사이의 적대감을 허무십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은 그녀에게 다가올 미래를 열어 보이시며 그 자리에 그녀를 초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이제 더 이상 어디에서 예배하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거주지에 따라 규정되던 정체성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것은 앞으로—아니, 이미—무엇을, 어떻게 예배하느냐의 문제라고 하십니다 (23절). 육신의 태생으로 형성된 우리의 인간적 정체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위로부터 난 자로서 성령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를 예배하는 데서 비롯된 정체성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메시아가 오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바로 그 순간, 자신이 그 메시아임을 그녀에게 선포하십니다.
그 폭탄 같은 선언이 선포되자마자 제자들이 돌아오고, 여인은 자리를 떠납니다. 그녀는 우물에 있던 실제 물과 물동이를 버려둔 채, 이제 자신이 “위로부터” 받은 물을 가지고 돌아갑니다. 그녀는 이미 그 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말씀한 대로, 성령을 통해 위로부터 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그녀에게 제자 삼으라고 명하신 것은 아니지만, 성령의 내적인 역사가 바람처럼 불어왔고, 그녀는 이웃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나눕니다.
이 여인은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여러 남편을 두었던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그녀가 공동체 안에서 어느 정도의 배척과 긴장을 겪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에게 실재가 된 소망을 담대히 전하며, 그들 역시 직접 그 소망을 대면해 보라고 초대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아갑니다. 참으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의 짧은 대화가 끝난 뒤, 39–42절에서 공동체 구성원들이 믿음을 갖게 됩니다. 처음 그들은 여인의 믿음 덕분에 믿었지만, 점차 그들은 스스로 믿게 됩니다. 그들은 여인의 말을 신뢰하기로 선택했고, 그녀의 초대를 (곧 그녀를 통한 성령의 초대를) 받아들임으로써, 직접 듣고 계속해서 믿기로 선택합니다. 그들은 진리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거두기만 하면 되는 추수로 묘사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눈을 열어 주변의 사마리아 사람들을 바라봄으로 이미 성령께서 이루고 계신 그 일을 보고 참여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추수꾼”이신 성령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하나로 모여드는 그 연합의 모습을 보며 이미 기뻐하고 계시며, 제자들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 함께 기뻐할 수 있도록 그들을 불러 모으는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하고, 신앙을 나누며,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을 존중하고, 함께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수고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너희”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입니다.
본문 포인트
20절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께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녀는 예수님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 전체를 의미합니다 (“당신들”은 헬라어 복수형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도 복수형으로 대답하시며,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배하게 될 이는 이 여인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녀와 같은 모든 사람들입니다. 이는 이 본문 전체의 더 큰 주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기초하여 연합을 추구할 때, 우리는 서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교회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그 모습은 모든 분열의 벽들이 허물어진 모습이어야 합니다. 인종과 민족, 성별, 사회적 계층이나 경제적 지위, 심지어 교단적 정체성 (혹은 그것이 없음을 고집하는 것) 등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는 모든 것은, 오히려 예배를 통한 성령의 통합하는 능력을 증언합니다. 그런데 왜 주일은 여전히 가장 분리된 시간으로 남아 있는 것일까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위하여, 우리는 우리가 인정하고 싶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4:5-42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