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공과는 5천명 이상을 먹인 기적을 담고 있는 요한복음 6장과 함께 시작을 했고, 그 뒤에 예수님은 세상의 떡으로서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 나누기 시작하셨습니다. 생명의 떡으로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오는 모든 이들에게 영적으로 양식을 주겠다고 말씀하시며, 영접과 믿음만 있으면 끝없는 식탁에 앉을 수 있습니다. 이번 주 본문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예수님께 던진 일련의 질문을 바탕으로 한 요한복음 6장으로 마지막 세 주간을 보내보세요. 그들의 질문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단순히 믿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요한복음 6장 35절과 41절-51절: “어떻게 하늘에서 왔습니까?”
도전: 하나님은 말이 안됩니다.
다음 주, 요한복음 6장 51절-58절: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주실 수 있습니까?”
도전: 하나님은 우리를 화나게 합니다.
마지막 주, 요한복음 6장 56절-69절: “누가 이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도전: 우리가 하나님의 일과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소포일러 주의! 답은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가능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시니까요.
이런 종류의 구조에 관심이 있다면, 데일 부르너는 그의 요한복음 주석에서 25절에서 71절 사이에서 10가지 질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주에는….
어떻게 하늘에서부터 왔을까요?
예수께서 자신이 생명의 떡이며 그들이 영적으로 결코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신 것을 들었던 사람들이 그 다음에 막힌 부분은 예수가 하늘에서 왔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가 그들 뿐만 아니라 앞에서 비교했던 모세와도 다른 존재가 됩니다. 그들이 예수의 부모를 아는데 어떻게 그가 하늘에서 올 수가 있단 말입니까? 심지어 예수의 성장 과정도 지켜보았는데도요?
유대 민족으로서의 집단적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그들 가운데 무언가를 행하셨을 때, 대부분의 경우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눈에 확연히 띄었습니다. 재앙에서 만나와 메추라기, 불 기둥, 공동 유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손길은 말구유에서 태어난 아기처럼 미묘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그가 사람들과 같을지라도 사람들이 눈으로 보았던 것과 인간의 기본이 되는 것이 그에게는 맞지 않음을 암시하고 계십니다. 말 그대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짜 맞습니다. 하나님은 말 그대로 그가 만드신 세상에서 이해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 그리고 자연 신학과 계시 신학을 말하는 이유입니다.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계시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만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 질서 안과 밖 모두에서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에서 우리를 일으키시고, 기적적이고 영원한 것에 대해 가르쳐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생명의 떡으로 묘사되는 것을 주목해 보세요: (1)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2) 아버지께서 우리를 아들에게 이끌리게 하셨습니다; (3) 아들이 우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4)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오셨습니다; (5) 떡이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4와5의 차이점은 아래 본문 참조); (6)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말씀하십니다; (7)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서 세상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살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능동적인 주체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 세상의 맥락에서 이해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하여 그들이 받아들여야 할 일들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신에 대한 믿음과 관련하여 이해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투쟁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계몽주의가 탄생하고 일부 사람들이 종교와 믿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현대 사회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위치를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당시의 많은 사상가들은 인간 이성으로 도달할 수 없는 지식의 영역인 특별 계시에 대한 필요성을 거부했습니다. 임마누엘 칸트처럼 기독교를 세상 모든 종교 중에서 가장 합리적인 “자연 종교”로 제시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적어도 기독교가 신도들에게 강한 도덕적 의무를 부여하기 때문이었니다. 이러한 철학의 많은 부분이 사상적 기초로 공유한 것은 신의 영역(본체의)과 이 세상의 영역(현상의) 사이에는 뚜렷한 구분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이성적인 사고로는 신에 접근할 수가 없기 때문에 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연구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세상, 즉 현상적인 것에 대해 알고 신뢰하며 그 위에 우리의 삶을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연구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인류가 존재한 이래로 하늘과 땅이라는 두 현실 사이의 경계와 서로의 상호 작용을 해석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요. “어떻게 하늘에서 올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당신이 이 곳에서 오신 것을 압니다, 예수님.” 그들은 예수님을 이 땅에 속한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들처럼 태어나고, 살아 숨쉬고, 일하는 존재로 말입니다. 어떻게 그가 이 땅이 아닌 하늘에서 올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비이성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는 이성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우리는 생태계와 생물학의 경이로움을 바라보며 만물이 그 설계에 따라 작동할 때 우리의 유익과 생명을 위해 작동하는 질서와 방식에 감탄할 수 있습니다. 일반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 특히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알게 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을 수 있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더 근본적인 일들이 있으며, 종종 하나님에 관한 일들을 아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실제로 알 수 있도록 인도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지난 2주 동안 사람들은 표적들, 즉 그들이 믿을 수 있도록 예수님이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가에 대해 계속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을 그들이 믿을 수 있도록 무엇을 보여주실 것인가? 이 부분에서, 예수님은 (다시) 그들이 보게 될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즉, 그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전적으로 이성에만 의존한다면, 신은 전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온 생명의 떡을 “영적으로 먹는” 데는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책임이 있다면 하늘의 영역으로 향하지 않고 계속 지상의 영역을 둘러보며 사물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감동이 없다면 우리의 사고 방식은 경이로움으로 가득찬 마음으로 순식간에 바뀌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으로 계속 오셔서 남은 시간 동안 신의 영역만이 있는 마지막 날까지 현시대에 장차 올 시대를 더욱 더 주입하신다고 말씀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 약속조차도 우리에게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은 이 땅이 유한하다는 것이지만, 그 약속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신다는 영원한 실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그 길로 가게 하셨고, 예수님이 그 여정에서 우리를 양육하셨으며, 실제로 우리를 우리의 운명 속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 “영원”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성으로만 그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지난 주에 들었던 것처럼, 우리의 양식인 그리스도의 영적 영양분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은 계시입니다. 지난 주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믿음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그것을 먹음으로써” 우리 안에 통합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주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설명을 확장하지만, 우리의 활동은 같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란 생명의 양식을 먹는 것이며, 이 세상의 종말이 올 때에도 우리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
본문 포인트
이번 단락은 분사로 가득차 있습니다; 분사에 사용된 시제에 주목하면,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중요한 신학적 요점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중에서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출텐데, 둘 다 현재와 과거 시제로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 43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가 그를 보내셨다(과거형 분사)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성육신이 단 한 번의 사건이었음을 암시합니다.
-50절에서, 예수님은 떡(그)이 오신다(현재형 분사)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몸으로 우리와 더 이상 함께 하지 않으셔도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를 먹이신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51절에서, 과거 시제와 현재 시제 둘 다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내려온(과거형 분사) 살아 있는 떡(현재형 분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 독특한 방식으로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하지만 그가 단 한 번만 그렇게 하셨지만 지금도 세상에 생명을 공급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칭의를 놓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의 섭리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화 아이디어
이 본문을 읽고 하나님을 나타내는 언어에 주목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는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끄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일련의 행동은 제가 목격했던 놀이터에서, 어떤 부모가 자기 아이로 하여금 새로운 친구를 사귀도록 격려하고 때로는 강요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물론 아이를 떼어놓기 위한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실제로 아이가 다른 사람을 알고, 친절하게 대하고, 관계를 경험하는 것이 좋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세상의 생명의 떡으로 보내시고, 우리가 그를 찾고 따르며 소망을 갖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미지로 떠오른 것은 이 단락에서 하나님이 전략가처럼 보이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보내시고,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시며, 우리를 일으키시고, 우리를 가르치시는 분이십니다. 위, 아래, 좌우로 하나님은 선한 목자처럼 우리를 목양하기 위해 모든 방향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6:35, 41-51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