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ionary는 이 본문을 성령강림주일에 배정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이 본문 속에서 성령께 집중하도록 돕습니다. 성령강림주일은 우리가 성령의 선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오순절에 또 하나의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는데, 그것은 “참된 친구“(데일 브루너의 번역), “신뢰케 하시는 분“(마틴 루터의 번역), 또는 “또 다른 보혜사“(헬라원어Paraclete 의 번역) 즉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셨고, 성령은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위해 강림하셨습니다.
이 초점을 잃게 되면 이 본문을 설교할 때 방향이 너무 많아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수많은 질문을 불러일으키고, 매우 과감한 선언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다 받는다고요? 그러나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은 기도들도 많습니다. 우리가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라고요? 그러나 실상 존재 전체를 창조하고, 유지하며, 구속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더 큰 (greater)”이라는 헬라어 단어에는 여러 뉘앙스가 있는데, 대부분 시간과 공간, 수량의 확장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질적 우월성을 의미하기도 하기에, 단어 자체만으로는 예수님의 의도를 명확히 풀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다가올 일을 “더 큰” 일이라고 부르신 것은 곧 사랑하는 이들에게 부어질 성령의 능력을 묘사하려는 시도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혜사“로 묘사하시면서 동시에 “진리의 영“이라고도 부르십니다. 이 세상은 이 영을 볼 수도, 알 수도 없기에 받을 수 없지만, 우리는 이 성령을 안다고 하십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우리 안에 영원히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7절). 이것이 첫 번째로 놀랍고 “더 큰” 일입니다. 즉, 하나님의 신비를 이해하거나 그 안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 당신의 일원이신 성령이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실 때, 이는 그분이 아버지와 가지셨던 친밀한 연합을 의미합니다. 본문의 초반(10-11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고, 서로 안에 거한다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도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17절).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그리고 그분의 하나님과의 연합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깊이 논의하지 않더라도, 신학적으로 우리의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이 성육하신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연합과는 다름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셨지만 동시에 완전한 신이셨습니다. 반면 우리는 단지 인간일 뿐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죄 많고 불완전한 존재인 우리에게 성령을 영원히 주시는 이 일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더 큰” 일일 수도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방식은 예수님 안에서 거하셨던 방식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삼위일체의 일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이 인간이셨기 때문에 우리의 성령 체험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와 무관한 비현실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위한 선물입니다. 성령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영향력을 가지시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름받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 역사하십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중재의 사역이 세상 가운데 드러나고 실현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사역하신 것도 놀랍지만, 평범한 인간인 우리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하게 하시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이 아닐까요? 아마 예수님께서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죄와 자기중심성,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며, 평화롭게 살아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살아가는 것이 본성적으로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말하려 하셨던 것 같습니다.
성령께서는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를 알게 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능력이십니다. 그리고 그 동일한 “진리의 영“이 우리 안에서 살아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 목적은 무엇일까요? 본문은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행한 일을 보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님 자신의 순종이 진리의 영에 대한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똑같은 순종을 요청하십니다.
따라서, 단순히 “만족“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진정으로 “더 큰” 일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나라와 평화(샬롬)를 구하는 마음으로 변화시키시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입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마땅합니다.
예수님은 17절에서 “볼 수 있다“는 말을 일부러 언급하지 않으신 것도 흥미롭습니다. 세상은 진리의 영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기에 받을 수 없지만, 우리는 그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에 알 수 있다고 하십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부활 이후에 하실 말씀을 미리 암시하시는 것 같습니다: “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것.” 이것이야말로 또 다른 “더 큰”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제 육신의 예수님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따르며, 그의 나라가 이 땅에 오기를 위해 기도하고 일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삶이나 사역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성령, 즉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의 “더 큰” 사역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변혁적 사랑의 위대한 사역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포인트
성령의 선물과 임재는 무엇보다도 복수형, 즉 공동체적 선물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14-17절에서 예수님이 “너희“라고 하실 때마다 복수형입니다. 25-27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12절에서 “믿는 자“를 현재진행형 분사로 사용하신 것을 통해, 이 복수 “너희“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지속적인 현재의 활동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성령의 사역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개념과 관련하여, 우리는 성례를 통해 그 예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성례는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실체들이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특별히 경험하게 됩니다. 또한 성례는 주님 나라 사역에 순종하라는 부르심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이름으로 불림받아 제자의 소명으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기억하게 되고, 성찬식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믿으며, 세상 속에서 화해의 사역자가 되도록 부름받았음을 되새기게 됩니다.
또한, “더 큰 일“이라는 개념을 성령의 임재와 사역을 경험을 통해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는 과정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예를 들어, 잘 짜여진 스웨터를 볼 때 그 솜씨를 단순히 감탄하는 것과, 그 스웨터를 만드는 데 어떤 과정이 들어갔는지를 알고 난 후에 느끼는 감탄은 완전히 다르고 훨씬 깊습니다. (저는 뜨개질을 하기에 이 예를 들었지만, 여러분도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를 예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스웨터 하나를 만드는 데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수많은 과정이 필요합니다. 어떤 디자인은 매우 복잡하고 완성하기 어려우며, 사용하는 실 또한 원래 패턴에서 사용한 것과 다를 수 있어, 섬유의 특성에 따라 바늘 크기나 샘플 조정에 많은 시행착오가 따릅니다. 또한, 손으로 뜨개질을 할 때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그리고 얼마나 자주 작업을 풀어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패턴을 수정하거나 새로 만드는 데 수학적 계산이 얼마나 필요한지 사람들은 종종 과소평가합니다. 스웨터에 담긴 과정을 알게 될수록 그 스웨터는 단순한 좋은 옷이 아니라, 놀라운 업적처럼 느껴집니다!
요한복음 8:14-17 (25-27)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