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자기 백성을 그의 군대 또는 부대라고 부르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위협적인 군대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방금 막 430년 동안의 노예 생활을 마쳤기 때문입니다. 벽돌을 만드는 과정에서 힘은 세졌을지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점이 많았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들이 애굽에서 대형을 갖추어 당당하게 행진하며 나왔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자신들의 모든 소유물과 애굽인들에게서 얻은 귀금속, 겉옷을 챙겨서 나오는 것만으로도 벅찼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 물건들도 이웃들에게 폭력을 써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아니라, 그저 달라고 요청했을 뿐이고,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들은 제복을 입은 정규군보다는 도망치는 난민의 모습에 더 가까웠을 것입니다. 본문은 그들이 광야로 나아갈 때 그들을 “잡다한 무리” 또는 “오합지졸”이라고 부릅니다. 게다가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성과 아이들, 수많은 가축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이 먼 길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매우 정밀한 지시에 순종했을 때조차, 적들의 눈에는 그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행동은 전술적이라기보다는 어설퍼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먼 길로 인도하신 이유는, 비록 군대라 부르셨을지라도 이렇게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전쟁을 마주하면 마음을 돌려 애굽으로 되돌아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하나님의 염려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홍해가 그들을 가로막자, 그들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불평을 터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버트 얼터(Robert Alter)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처음과 다름없이 두려워하고 반항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순간은 광야 서사 전체에 걸쳐 줄곧 되풀이될 기나긴 원망의 서막을 알리는 지점이다.” 그러나 비단 광야에서만의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번 경우처럼 벽에 부딪히거나 진퇴양난에 빠질 때마다 이런 일이 일어나곤 합니다. 아담은 “주께서 내게 주신 그 여자가…”라고 핑계를 댔고, 하와는 “뱀이 말하기를…”이라며 발을 뺐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요. 야곱은 형을 속이고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이 모든 방황 끝에 약속의 땅 문턱에 도달했을 때, 정탐꾼들은 “그 땅에는 거인들이 산다”라고 보고하게 됩니다.
우리 역시 두려움과 반항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당장 얼마 전 일만 떠올려 봐도 그렇습니다. 전 세계적인 팬데믹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의 모든 대처 방법이 생명을 살리고, 너그러우며, 공의롭거나 자비롭지만은 않았습니다. 저 역시 꽤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소셜 미디어에서 부정적인 뉴스만 찾아보며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우리는 불의를 보았고, 화를 냈고, 상황에 압도되어 낙담했습니다. 그 누구도 이 시련 속에서 제복을 칼같이 다려 입고, 군화를 반짝이게 닦은 채, 대형을 유지하며 당당하게 행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할 때 엉망진창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위안이 됩니다. 우리 역시 그 모습에 공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홍해 앞에 가로막힌 채, 그들은 말과 전차, 갑옷과 무기로 무장하고 추격해 오는 바로의 군대, 즉 진짜 군대를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인들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습니다. 다만,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이야기에 새로운 국면이 열립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세상에 늘 존재하셨고, 노아에게 말씀하셨으며, 음성과 천사의 방문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지만, 백성들 가운데 눈으로 볼 수 있는 지속적인 실체로 임재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광야를 방황하는 내내,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그들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성막이 세워진 후에는 그 위에 머물렀고, 마침내 약속의 땅에 백성들을 위한 성전이 건축되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가득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이제 백성들 가운데 눈에 보이는 지속적인 동행이 되었으며, 그들을 전술적으로도 인도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가장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 즉 먼 길로 돌아가라는 정밀한 지시를 내리십니다. 이에 따라 바로는 백성들이 어리석고 약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얼터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군사적 유인 전술을 명하셨다. 히브리인들이 북쪽으로 애굽을 빠져나가는 가장 짧고 확실한 해안 루트를 따르지 않은 것을 본 바로는, 그들이 길을 잃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추격군이 도망친 노예 무리 전체를 손쉽게 포위하고 다시 붙잡을 수 있는 막다른 곳으로 들어갔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는 날이 저물자 백성들과 추격해 오는 군대 사이를 가로막아 서시며 이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나섭니다. 구름과 불의 조합은 마치 깊은 안개 속에서 상향등을 켜고 운전하려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이에 따라 애굽인들은 완전히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또한, 시야가 차단된 애굽인들은 밤새도록 자신들이 적들을 꼼짝 못 하게 묶어두었다고 착각했습니다. 반대편에서 어떤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이는 홍해 횡단의 대부분이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에 일어났음을 의미합니다. 그저 물 사이를 걷기만 한 것이 아니라,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걸어간 것이었습니다. 동이 트자 기둥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애굽인들은 백성들이 바다를 등지고 웅크리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그 뒤를 쫓았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나아갔고, 결국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게 되어 더 이상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완벽한 함정에 걸려든 셈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보인 첫 번째 반응은, (모세의 예상과는 달리) 그들이 마침내 모세를 신뢰하게 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양했습니다. 홍해 반대편에 도착한 사람 중 그 누구도 “우리가 해냈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아직 말랐는지 젖었는지도 모를 그 땅에 첫발을 내디뎌야 했습니다. 그들은 위태롭게 일렁이는 거대한 물벽 사이를 지나가며 그것이 무너지지 않을 것임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발걸음을 내디뎌야 했고, 그들의 지도자를 따라야 했으며, 낮에는 구름 기둥을, 밤에는 불 기둥을 신뢰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의 핵심이자 궁극적인 메시지는 그들의 군사적 힘이나 전술적 천재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던 기적이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오늘도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우리 모두가 붙들어야 할 목표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글로벌 팬데믹과 같이 세상을 뒤흔드는 위기 속에서, 우리 자신의 천재성, 방역 지침, 과학, 혹은 과학에 대한 회의론 덕분에 그 혼란을 뚫고 건너편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매 순간 현명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집에서 아이들을 위한 임시 교실을 마련하려고 애쓰면서, 혹은 또 다른 인생의 소중한 순간이나 가족 모임, 따뜻한 포옹을 놓치면서, 우리는 그 막막한 감정들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합니다. 우리는 그때그때 제일 나은 선택을 내리고, 눈앞에 닥친 일들을 하나씩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배우고 적응합니다.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우리에게 있는지조차 몰랐던 깊은 믿음의 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끝났을 때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을 가장 중요한 고백은, 결코 우리가 우리 힘으로 자신을 구원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행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는 선택 속에서도 묵묵히 걸어가도록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지도자들의 무기력함에 탄식하고 수많은 상실에 눈물 흘릴 때 우리를 붙들어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마른 땅인 양 믿음으로 한 걸음씩 내디딜 수 있도록 우리를 보호하시고 이끌어 주신 분 역시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화 아이디어:
잘 훈련되고 모든 것이 잘 갖춰진 군대에 맞서 싸우는 오합지졸의 이야기는 소설이나 영화, TV 쇼, 만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흔한 클리셰인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약자가 강자를 꺾는 통쾌한 역전극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설교자도 이 본문을 그런 방식으로 풀어나가기 쉽습니다.
하지만 저는 1988년 작 《더 베어(The Bear)》라는 조금 덜 알려진 영화를 예로 들어보고 싶습니다. 영화에서 버려진 새끼 곰은 어쩌다 수컷 회색곰과 친구가 되고, 그 곰은 마지못해 숲속 생활을 위해 이 어린 새끼 곰의 멘토 역할을 맡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나운 맹수가 새끼 곰을 추적해 덮쳐옵니다. 겁에 질린 작은 곰은 배운 대로 뒷발로 서서 으르렁거려 보지만, 그 가소로운 몸짓이 맹수의 눈에 위협이 될 턱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맹수의 눈이 커지고 귀가 뒤로 처지며 살금살금 꽁무니를 뺍니다. 화면이 넓게 뒤로 빠지고 나서야, 비로소 관객들은 새끼 곰이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아직은 몸집이 작은 자신의 제자 뒤에서 당장이라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서 있는 거대한 성체 회색곰의 모습입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이번 본문에 더 잘 어울리는 찰떡같은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출애굽기 14장 19-31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