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1:12-17 주석

앞으로 몇 주간 바울이 그의 동역자 디모데에게 했던 조언과 격려에 대해 나누려고 합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가장 가까운 동역자였으며, 절친이었으며, 멘티였으며, 교회를 인도하는 일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맡길 정도로 신뢰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또는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이 심각한 불화를 일으키고 회중들을 곤경에 빠뜨릴 때 그들을 디모데에게 맡길 정도로 그를 신뢰했습니다. 디모데가 할 일은 거짓 가르침과 교사들의 문제를 다루는 것과 교회를 하나되게 되돌려 놓는 것, 그리고 교회를 건강한 믿음과 교리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코 작은 임무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이, 자신감 있고 유능한, 바울의 조수인 디모데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바울에 비하면 그는 어렸고, 순수혈통도 아니었고, 소심했습니다. 그가 교회 안에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지도자들을 이끌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을 지키고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를 격려하기 위해 편지를 썼고, 그를 교회의 권위자로 세우기 위해, 물론 당연히, 온 회중이 그 편지 낭독을 듣게 될 것이기 때문에 편지를 썼습니다.

오늘 우리가 선택한 본문은 바울이 디모데를 고양시키기 위한 한 작은 예에 불과합니다. 그가 디모데를 어떻게 격려했는지는 정말 흥미롭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의 전통적인 ‘감사’ 부분 대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찬양과 개인적인 간증을 넣었습니다. 그는 ‘나’ 를 11번이나 사용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님의 이야기의 맥락 속에서 그 누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방식으로 이 편지를 썼습니다.

행간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이 사용하시기에 바울이 충분한 사람이었다면 디모데 역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사랑과 긍휼과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보셨다면 디모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악한 죄인 바울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면, 디모데를 위해서도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하게 하시고 그를 통해 교회를 세우신다면 그리고 디모데를 통해서도 그렇게 하신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서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계속해서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바울과 디모데가 하나님이 사용하시기에 충분한 사람들이었다면 우리도 그런 사람들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바울과 디모데를 사랑과 긍휼과 은혜에 합당한 자로 여기셨다면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바울과 디모데와 같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면, 하나님은 우리 또한 구원하러 오셨고, 만일 하나님이 바울과 디모데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말하게 하시고 그들을 통해 교회를 세우게 하셨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일을 말하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 교회를 세우게 하실 것입니다.

 

“Who stole the cookie from the cookie jar”라는 동요/게임이 생각납니다. 여러분이 그 동요에 관심이 없으시더라도 한 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누가 사용되고 있습니까?”

성령: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디모데가 사용되었단다!”

디모데: “누구요. 저요?”

바울과 성령: “그래. 너 말이야!”

디모데: “그럴리가요!”

성령: “그럼 누구겠어?”

 

바울: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누가 사용되고 있습니까?”

성령: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네가 사용되고 있단다!”

우리: “누구요. 저요?”

성령: “그래. 너 말이야!”

우리: “그럴리가요!”

성령: “그럼 누구겠어?”

우리가 우리에 대한 자기 의심을 가진다거나 우리를 우리보다 ‘나은’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이 믿음의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우리의 은사나 재능이나 권위, 또는 신앙 공동체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성품을 나타내시는 헤아릴 수 없이 인내심 많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신실하십시오.

만일, 그것이 당신을 확신시키지 못한다면.. 참고로 “신뢰/믿음” 어근이 바울의 간증 중간에 있는 다섯 구절에 여섯 번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사역이, 그리고 연합에 의한 모든 사람의 사역이, 그를 신실하다고 판단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것이라고 썼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추잡한 과거를 위와 같은 어근을 가진 단어를 사용해 ‘불신의 시대’라고 표현했고, 자신의 믿음을 주님의 넘치는 은혜의 결과로 이해했습니다. “확실하고 온전하게 받아들일 만한”이란 말은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부 번역에서는 그것이 “충실한 말” 또는 “신뢰할 만한 말”로 언급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이 바울의 무엇에 관한 것입니까?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고 스스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메시지’ 성경에서 유진 피터슨은 16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은 하나님을 평생 믿는 것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증거로 보이게 하십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이렇게 됩니다. ‘만일 나 바울이 충분하다면, 디모데 당신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에베소가 받고 있는 나쁜 가르침에 흔들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평생 신뢰할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 가운데 있는 모범적인 사람을 통해 예수님의 다양한 인내와 목적에 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디모데에게 심어주려는 확신이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마치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동료, 친구, 절친이여, 당신은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안에서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강하게 하시고 당신의 신실함을 보시고 당신을 섬기도록 임명하시고 당신에게 풍성한 은혜와 자비를 부어 주고 계십니다.”

바울은 그것이 사실임을 알았기에 이렇게 쓸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 중에 으뜸이며, 하나님의 역사를 빛낸 삶의 본보기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본문 다음에 나오는 구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바톤을 넘깁니다. “나의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져라”(18절, 강조체 추가) 예언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안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라는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말보다 더 큰 하나님의 계획이 어디 있겠습니까? 디모데가 할 일은 에베소 사람들이 이것이 그들의 삶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이해시키고, 거짓 교사들을 무지하게 따르는 것에서 돌이켜 세우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적으로 알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만 있는, 각 사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믿음과 사랑이라는 바로 그 은혜 말입니다.

와! 이 일은 정말 작은 임무가 아닙니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 그 영광과 존귀를 영원무궁토록 받으실 것입니다. 아멘.

예화 아이디어

우리들 대부분은 “Amazing Grace”를 감동적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이 유명한 찬송가는 John Newton에 의해 그가 개종하고 노예 무역이라는 오랜 경력을 뒤로 한 체 목회에 들어선 여러 해 이후에 작곡되었습니다. 뉴턴은 1748년 노예선에서 위험한 폭풍우가 몰아칠 때 개종을 경험했지만, 건강 악화로 1754년 은퇴할 때까지 노예사업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안수를 받았고, 그 직후인 1772년 “Amazing Grace’s”의 원작명인 “신앙의 검토와 기대”라는 글을 썼습니다. 오늘 바울의 본문처럼 이 노래 역시 풍성하고 과분한 자비와 은혜에 대한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자 감사입니다. 뉴턴은 하나님의 은혜를 죄인 된 그를 지탱하도록 끊임없이 일하는 대리인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뉴턴이 이 유명한 찬송가에서만 자신의 과거에 대해 바울과 비슷한 감정을 표현했던 것은 아닙니다. 1788년에 출간된 소책자 “아프리카 노예 무역에 대한 생각”에서 뉴턴은 바울과 비슷한 말들을 사용하면서 예수님의 생애를 묘사했습니다. 바울처럼 뉴턴도 자신이 살았던 과거의 죄 많은 생활 방식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어린 시절, 내 강한 열정과 어리석음은 나를 어려움과 고난의 연속된 삶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바울처럼 뉴턴도 자신의 죄에 대한 무지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지금처럼 그것이 불법이고 잘못된 것을 인지하고, 보다 일찍 그 일을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당시에 한 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친구도 나에게 그런 생각을 제안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내게 할당된 삶이라고 여기면서.. 무지하게 행했던, 내가 한 일.”(강조체 추가) 바울처럼 뉴턴도 하나님께 공을 돌렸습니다. “나의 생각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이 나를 그 사악한 일로부터 멀어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해 바울에게 박해에 해당하는 뉴턴의 노예 무역이 끝을 맺습니다. 1754년에 뉴턴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선장으로서 기니 해안을 떠났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여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그것은 나의 마지막 여행이 되었습니다.  네 번째 항해를 떠날 준비를 하고, 막 항해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갑자기 병에 걸려, 다른 사람에게 선장을 넘기며 사임했습니다.”

바울과 뉴턴은 그들의 과거를 숨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소책자에서 뉴턴은 노예 무역에서의 자신의 역할과 그것이 어떻게 그를 괴롭혔는지에 대한 깊은 후회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지금은 치를 떨게 하는 그 사업에 내가 한때 종사했었다는 것이 나에게 늘 수치심을 주기를 바라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