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레몬서 1:1-21 주석

바울이 보낸 이 작은 편지가 교회에게는 얼마나 큰 선물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약 성경에 있는 바울이 보낸 모든 편지들은 삶과 믿음의 실제적인 문제들에 관한 것이고 그의 모든 지침, 조언, 가르침 및 훈계는 심오한 기독론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다른 어떤 편지도 빌레몬에게 보낸 이 편지 만큼이나 바울의 개인적인 신학과 믿음을 잘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이 편지의 배경을 생각해 봅시다. 빌레몬과 바울에게는 지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빌레몬은 바울의 사역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빌레몬에게는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있었는데, 주인과 종 사이에 일종의 불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 일로 오네시모는 주인을 떠났습니다 (그가 실수를 저질렀거나 주인에게서 물건을 훔쳤거나, 아니면 빌레몬에게 학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도망쳤을 것입니다). 결국 오네시모는 바울의 문앞에 이르렀습니다. 빌레몬에게 했던 것처럼 바울은 편지에서 자신을 오네시모의 “아버지”로, 오네시모를 “내 자녀”로 묘사하면서 오네시모를 믿음으로 이끌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이 편지를 그 손에 들려서 오네시모를 다시 빌레몬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화해하라는 복음의 부름에 합당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 할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었고, 빌레몬 역시 그렇게 해주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 편지는 우리에게 골로새서로 알려진 편지와는 매우 가깝습니다. 빌레몬은 그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었으며, 비록 빌레몬서가 빌레몬과 그 외 몇 명의 사람들에게 보내졌지만 이 편지의 시작과 끝에 있는 구문과 문법을 살펴 보면, 이 편지는 전체 가정 교회 앞에서 읽혀지도록 의도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렇게 하든 안 하든 그것은 빌레몬의 결정에 달린 일이었겠지만, 바울의 다른 편지들과 마찬가지로 공개적으로 읽혀지도록 쓰여졌을 것입니다.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를 통해 그들은 무엇을 들었을까요? 골로새서에는 두 가지 주요 주제가 있습니다.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7)는 것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화목케 하신 것처럼 복음은 바로 화목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동등한 사람들로 구성된 새로운 가족을 세우셨듯이,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골 3.11) 바울이 오네시모에 대한 탄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주제들은 바울이 오네시모와 빌레몬을 함께 살게 하는 데 있어서 적합한 신학적 주제들입니다.

바울은 이제 오네시모가 믿음에 이르렀고, 예수님께서 오네시모를 믿음의 가족 안으로 인도하셔서 그를 동일한 형제로 삼으셨음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이러한 신분이 그들의 공동체와의 관계에 반영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종이고 빌레몬은 그의 주인일지라도, 그들 관계의 기초는 이제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아들됨입니다. 우리 현대 독자들은 이것이 바울로 하여금 더 담대하게 만들어(8절에서 그가 빌레몬에게 지시한 대로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라고 명령하기를 바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이 지금 하는 말도 얼마나 급진적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노예가 어떤 식으로든 주인과 동등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뒤엎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오네시모를 “사랑하는 형제”로 묘사하고, 16절에서는 일종의 ‘누가 알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있는 사랑에 근거한 바울의 호소는 – 오네시모가 하나님의 “영원한” 가족에 합류할 수 있도록 이 모든 상황이 일어난 것인지도 모릅니다 – 정말 급진적이고 변혁적입니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바울은 빌레몬이 구원에 대한 지식을 얻도록 기여했던 자신의 역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위와 권세를 사용할 수도 있다고 암시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바울은 자신을 사도라고도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 명칭은 그가 다른 편지에서는 자신을 나타내는 핵심적인 방식입니다. 대신에 공동체 내에서 날마다 작동하고 있는 믿음과 사랑에 호소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갇힌 자이며 노인으로 고난을 당하다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 빌레몬, 오네시모를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형제라고 함으로써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가 오네시모와 함께 시작한 사역을 계속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빌레몬과 교회가 단지 돌아 온 오네시모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가족 구성원으로서 받아 들여야 하며, 따러서 서로 화해함으로써 그렇게 하기를 촉구했습니다.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은 그 길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동등한 일원으로서 믿음의 가족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오네시모와 그의 어려운 상황에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볼 때 바울을 보기를 매우 확실하게 원했습니다.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라고 그는 17절에서 간청합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 때문에 발생한 재정적 비용이 얼마든지 간에 자신에게 두라고 명령합니다. 바울은 화해하는 일에 있어서 오네시모와 함께 하기 위해 얼마나 열정적으로 헌신했는지를 강조하기 위해 친필로 “내가 갚겠다!”라고 씁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의 마음”이라고 부르고 빌레몬을 그의 “동역자”라고 부르면서, 이렇듯 특별한 화해를 나타내는 일에 그들이 동참하기를 부탁합니다. The Two Horizons 시리즈의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에 대한 주석에서 Marianne Meye Thompson은 다음과 같이 씁니다. “바울은 자신의 주님의 본을 따라 자신을 주는 사랑을 하고 있고 그들의 죄책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것 때문에, 약한 자들과 곤경에 처한 자들과 동일시 합니다. 누구에게 책임이 있고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지는 바울의 주된 관심사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은 서로 아무리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도 화해시킬 수 있으며, 심지어 상대방에 대해 정당한 주장을 할 수 있는 사람조차도 서로 화해시킬 수 있습니다.” 바울은 관계에 있어서 힘이 없는 약자 편에, 잘못이 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편에 섭니다. 바울은 그들의 고통에 기꺼이 동참함으로 그들의 죄책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짋어집니다. (바울의 상황이 얼마나 더 나빠질 수 있는지 궁금해 할 수 있지만… 그는 이미 가택연금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바울 안에 계시고, 그리스도는 오네시모 안에 계시며, 그리스도는 빌레몬 안에 계십니다. 이 사실은 겉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바울이 사도로서의 권리를 강조하지 않은 것처럼 빌레몬의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근거로 오네시모와 빌레몬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져야 하는지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빌레몬을 더 높은 표준, 즉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과 주 예수에 대한 신실함으로 나타내는 순종을 요구합니다. 오네시모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울이 편지를 그의 손에 쥐어주고 길로 보내자마자 다른 방향으로 떠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새로 발견한 신앙 생활의 일부로서 화해하기로 했고 모든 일들이 바로잡혀 새로운 현실이 시작될 수 있도록 편지와 기도를 들고 골로새에 나타났습니다. 대중들에게 공개 될지도 모르지만, 빌레몬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에서 골로새 교회에게는 바울에게서, 따라서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실제적인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빌레몬을 시작으로 그들이 진정으로 믿었던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본문 요점

오네시모의 이름은 “유용하다”는 말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이것은 주인이 노예에게 부여하는 일반적인 이름이었습니다. 또한 노예를 사거나 계약을 맺은 도시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편지 전체에서 오네시모의 이름과 “유용한”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11절에서 그는 오네시모가 도망함으로써 빌레몬에게 “쓸모없게” 되었지만 믿음을 갖게 됨으로 오네시모가 바울과 빌레몬에게 “유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바울이 이 편지에서 하는 근본적인 요청은 빌레몬이 오네시모와 화해하고 그를 풀어 주고 바울을 섬기도록 다시 보내려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유용한”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비중을 생각해 보면 필수적이지는 않습니다. 사실, 누군가의 가치에 대한 더 큰 논쟁이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면 어떨까요? 만약 바울이, 누군가에 대한 소유권이나 통제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격을 강조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바울이 오네시모를 돌려주기를 바란다는 식으로 “유용한”이라는 단어를 해석하려는 유혹은 바울이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이 혜택을 얻게 하고”라고 쓴 20절에서 볼 수 있는 이 단어에 대한 마지막 언어유희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혜택”은 오네시모의 이름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그러나 여기에서도 바울이 영적인 자녀들이 믿음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을 보는 것이 평안을 얻기 위한 희망이라면 어떨까요? 마음이 상쾌해 지는 사역의 순간은 하나님께서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키시는 역사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을 볼 때입니다. 바울의 희망은 그리스도께서 빌레몬과 공동체 안에 일하셔서 소외되고 멸시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사랑받고 소중히 여겨지며 존중 받는 사람으로 환영하는 것입니다.

생각할 점

믿음의 가족 내에서의 화해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정말로 필요한 것입니다. 죄가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형제 자매들을 옹호하고 동일시하는 것은 기독교 공동체에게는 계속해서 큰 도전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권리에 대한 논쟁과 정당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더 높은 표준에 따라 사는 일에 쉽사리 실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최전선에서 노동자들과, 비영리 단체들과, 우리보다 더 많은 열정과, 시간과, 자원을 가진 사람들에게, 우리가 해야 되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옹호와 연대를 위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재의 정치 환경에서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이러한 질문이 전면에 떠오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법의 테두리 밖에 있는 이민에 대한 기독교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시민권과 사회적 지위와, 우리가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사실 중에 더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과만 연대한다는 뜻입니까? 더 나아가서 북미 교회들이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입국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화해하는 것보다 박해 받는 아시아 가정교회의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더 쉬워 보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니면 가까운 우리 주변에서 생각해 볼까요? 매 주일 만나기는 하지만 계약이 깨진 이후로는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던 비즈니스 파트너는 어떻습니까? 최근에 석방 되어 당신의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범법자는 어떻습니까? 빌레몬이 화를 내고 오네시모에게 그리스도와 같은 일을 하기를 아주 주저하던 이유를 상상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바탕으로 살아가고 세상 안에 있는 모든 개개의 것들과 사람들과도 화해하는 세상을 추구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서로 용납하십시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위의 것을 찾으십시오. 이런 일들은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게 권면한 일들 중 일부일 뿐이며, 우리 서로가 화해하기 위해 감수해야 할 일들 중 일부 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