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o González는, 본문 1절-3절의 힌트를 따라, 이 비유들이 잃어버린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코 잃어버린 적이 없는 자들”, 즉 어리석게도 하늘의 의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렉셔너리 본문은 수군거리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무엇에 대한 수군거림입니까?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이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문을 열어 주시면서 그들을 환영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공동체 안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죄인입니다. 세리의 경우는 이방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 때문에 음식을 부정해지는 것에 대해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정결 의식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이 일은 짜증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세리와 죄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께 왔고, 회개의 길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군거리는 바리새인들이 그 가능성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세 가지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 비유는 사실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의 관점에서 보는 그들의 태도/맹점에 대한 하나의 이야기 (비유라는 단어가 단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세 비유 세트의 세 번째 이야기인 ‘탕자의 비유’를 따로 떼어 놓으면, 우리가 놓쳤을 지도 모르는 것들을 보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당연히 세 번째 이야기가 예수님의 메시지의 절정입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양 이야기와 잃어버린 동전 이야기 안에 잃어버린 아들들 이야기에서 다루지 않는 많은 내용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제 중 하나가 이야기들이 서로 짝을 이루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이 부자와 가난한자의 삶을 예로 들면서 남자와 여자와 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도 예외가 아닙니다. Kenneth Bailey는 이것이 단순한 누가의 모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의 생애와 가치관과 사역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 모음이라고 지적합니다. 이것이 단지 효과적인 이야기 기법들이 아니라, 평등, 포용, 그리고 접근성에 있어서 위계가 없는 관계 등,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가치 그 자체에 대한 함축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부유한 남자 목동 (양 100마리는 큰 떼입니다)과 가난한 여자 (그녀가 모은 열 드라크마는 약 일주일 반 치의 품삯입니다)의 이야기를 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남자와 그 여자를 자신과 동일시하시면서 그들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십니다.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동전 이야기는 탕자 이야기에 나오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더욱 풍성하게 묘사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형상화합니다. 탕자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잃어버린 아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가운데 자신의 일과 책임을 다하면서 간절하게 기다립니다. (우리가 가정하건데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중보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목자는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 양을 남겨 두고, 여자는 잃어버린 동전을 찾기 위해 오래도록 수고합니다.
Kenneth Bailey가 대략적으로 설명한 것처럼, 예수님은 처음 두 이야기를 통해 속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The Cross and the Prodigal: Luke 15 Through the Eyes of Middle Eastern Peasants).
- 하나님은 손실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십니다.
- 하나님은 비용을 계산하지 않고 찾으십니다.
- 하나님은 회복을 위한 부담을 기뻐하십니다.
- 하나님은 회복의 성공을 공동체와 함께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손실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십니다. 목자는 양 떼 중 한 마리를 잃어 버렸습니다. 비록 “그가 그 양을 잃어 버렸다”(이웃들에게 그렇게 말한 것처럼)고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그 양을 찾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완료 시제를 사용하여 그 양을 “잃어 버렸다”고 묘사하십니다. 그 양은 길을 잃었고, 그 “잃어버림”이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동전이 스스로 자신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잃어버린 양도 자신을 스스로 ‘되찾을’ 수 없습니다. 두 경우 모두, 그들이 발견되기 위한 누군가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큰 사랑으로, 잃어버린 자의 회복을 위해 헌신하십니다.
하나님은 비용을 계산하지 않고 찾으십니다. 찾고 구출하는 데 헌신하신 예수님은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잃어 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목자가 아흔아홉 마리 양을 남겨두었을 때, 물론 그 양들이비교적 안전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목자는 재산 중 1%에 불과한, 사업상으로 손실 가능한 범위 안에 있는 그 양을 되찾기 위해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두고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여인은 잃어버린 동전을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샅샅이 뒤지며 자원과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기꺼이 고통과 죽음을 감내하시면서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를 따지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회복을 위한 부담을 기뻐하십니다. 자신을 찾아온 세리와 죄인들이 회개할 수 있는 길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기꺼이 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식사하셨던 것처럼, 목자와 여인도 찾고 구하는 일을 끝마친 것을 기뻐합니다. 이 이야기들이 회복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우리의 회복을 위한 수고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시는 것에 놓여 있습니다. Bailey는 회개의 아름다움에 대한 뉘앙스를 제공합니다. 회개는 우리가 잃어버린 상태에서 성령에 의해 “발견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품으로 인도하시며, 그곳에서 우리를 그분의 의로 덮어 주시고, 우리는 새로운 길을 따르고 본받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은 회복의 성공을 공동체와 함께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초대를 받아 들인다면, 천상의 잔치는 지상의 잔치가 될 수 있습니다. 또는 더 적합한 표현으로, 예수님이 종교적 우선권이나 의견이나 견해나 어떤 사람이 안에 있고 어떤 사람이 밖에 있는 지에 대한 경계선에서 길을 잃은 우리를 찾아 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천상의 잔치는 우리의 지상의 잔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번 여름에 우리는 렉셔너리 본문들을 통해, 예수님이 종교적 수용 가능성과 의식적 정결의 경계에서 사람들을 흔들어놓으려고 애쓰시는 모습을, 곧 그분이 누구를 잔치에 초대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지, 안식일에 누구를 어떻게 치유하시는지, 기쁨의 확산을 막으려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 그리고 사람들의 일부가 어떻게 반응하는 지,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들은 잔치를 원하지 않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을 축하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규칙”이 깨졌고, 그것은 공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Bailey 가 회복을 부담으로 묘사하는 이유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넘어, 우리의 “잃어버림”에 눈이 먼 우리는, 다른 사람이 경험하는 회복에 대해 부담이 됩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준비했던 것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삶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는, 회복의 잔치에 대한 성령의 초대를 거부할 때 길을 잃게 되고, 그렇게 구원받아야 할 또 다른 양이나 동전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성령 하나님께서 행하고 계신 일을 축하하기를 거부할 때, 한 사람에게 베풀어진 선함과 과분한 돌봄이 모든 사람에게 보여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다른 양들과 함께 집에서 쉬고 있을 때, 우리는 소외되고 “길을 잃게” 됩니다.
하지만,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동전처럼 우리 자신이 바닥에 있는 틈새나 틈새 깊숙한 곳에 빠질 수 있지만, 잃어 버린 동전을 찾던 여인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발견되고 회복될 때까지 멈추지 않으실 것입니다. 점차적으로, 주님의 뜻이, 곧 우리가 우리의 태도와 배척으로부터 회개하는 것이 축하의 이유가 될 것입니다.
본문 요점
Bailey는 누가복음 15장을 다룬 여러 저서에서 예수님의 세 가지 비유를 시편 23편과 연결지어 해석하고, 다 나아가 이 이야기들을 예레미야서와 에스겔서의 여러 부분과 연관짓습니다. 잃어버린 양의 관점에서 시편 23편을 “이야기”로 비유한 것; 잃어버린 양을 찾았을 때 영혼이 회복되는 것, 한때 반대했던 사람들과 함께 만찬의 자리에 앉는 것, 시편 전체를 뒷받침하는 목자의 은혜롭고 사랑스런 사역, 이 병행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더 읽고 싶으신 분들이 있다면, Bailey의 ‘The Cross and the Prodigal’를 추천해 드립니다.
예화 아이디어
Francis 교황이 가슴에 착용한 십자가는 선한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어깨에 메고, 온 무리가 그 뒤를 따르고, (비둘기로 표현된) 성령이 십자가 위에 머물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르헨티나 대주교 시절부터 이 십자가를 간직하기로 한 것은, 예수님을 따르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교회의 부르심, 곧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환영하라는 것을 기억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양 떼의 모습을 이 일에 기꺼이 참여하고자 하는 우리의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15:1-10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