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왜 일하려 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거나, 예수님이 이미 재림하셨다고 여겼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그 지역에 발생했던 기근 이후 상황이 다소 절망적이어서 그랬던 것인가요? 혹시,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흔하게 통용되던 매우 정상적인 ‘후원자-수혜자 관계 패턴’(Pattern of Client-Patron Relationships) 안에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우리는 이들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이 무엇인지 (또는 이러한 여러 시나리오들의 어떤 조합이 가장 잘 작용되고 있었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쓴 내용과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 안에 있는 그의 교훈들에 근거해 볼 때 이 문제가 그들에게 전혀 새로운 이슈는 아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본문으로 들여다 볼 때 이 모든 상황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울의 말이 굉장히 가혹하게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으른 사람에게서 떠나라니.. 예수님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마태복음 25.35)라고 하신 말씀과 상반되지 않습니까? 바울의 교훈은 14절에서 더욱 확고해 집니다.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데살로니가후서 3:14) 그러나 15절은 바울의 엄격한 교훈을 누그러뜨리는 데 도움을 줍니다. ‘무위도식자들’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는 말을 한 직후에 바울이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4)고 했습니다. 문제의 사람들 또한 그 사회의 일부분이었고, 그래서 그들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인간 존재로서만 아니라, 그 사회의 일부로 살아가는 방식도 중요합니다. 바울이 자신의 수 많은 편지에서 암묵적으로 상기시키고 있는 것처럼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은 로마 제국의 안전을 위한 핵심입니다. 격동의 시대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이 더불어 살아가면서 서로를 돌보는 것은 믿지 않는 이웃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동체 구성원 중 일부가 모든 사람의 복지에 기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서로를 돌보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 진정으로 참여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박해 받는 공동체의 생존과 도시 안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의 명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데살로니가 지역으로 선교 여행을 갔을 때 그곳의 상황을 둘러보고 다른 도시들에서 하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그곳에서 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바울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지역 주민들로부터 기부를 받지 않았고, 자신과 다른 사역자들이, 그리고 선교사들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밤낮으로 (이중직으로 bivocationally) 열심히 일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지만, 항상 그들이 먹는 것에 대해 값을 지불했습니다. 예수님과 바울의 가르침은 선교사들을 포함한 사역자들이 섬기는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고, 복음 전파를 위해 다른 믿는 공동체들로부터 모금되는 (축하 받는 celebrated) 기부를 허용합니다. 그러나 여기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은 자신의 존재 방식이 어떤 이야기를 말하고 있고, 필요한 변화의 예를 보여주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더 나은 삶의 방식을 알려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양심적인 선택을 통해 수 많은 편지에서 흔히 말했던 것처럼 자신을 본으로 삼았습니다. 이번에는 자신을 믿음과 지식의 본이 아니라 실천의 본으로 삼은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형성되어 있던 믿는 이들의 공동체에 재정적으로 부담을 주거나 그들의 자원을 빼앗지 않고 축복하고 헌금했습니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도 그렇게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일하려 하지 않거나 일하고 있지 않았던 여러 이유 부분으로 돌아가서, 그들 중 누구도 일할 능력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0절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데 용인되는 방법을 선택했지만, 바울의 기준으로 볼 때 그것은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경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는 기독교적인 기준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거나, 예수님이 이미 재림하셨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들이 일하려 하지 않았습니까? 기다리던 것을 놓쳐 버렸을 때 우리도 조금은 낙심될 때가 있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편지의 앞부분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혼란을 깔끔하게 정리했습니다. 따라서 아무도 계속해서 우울한 상태로 있거나, 예수님 재림에 대한 혼란을 핑계 삼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그 때 그곳에서 그리스도들의 의로운 삶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계속 일하기를 꺼려 한다면 그 변명은 더 이상 가능한 핑계 거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이 편지가 주후 51년에 있었던 기근 이후에 기록되었다면,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음식을 얻기 위해 심하게 고군분투했던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기근과 빈곤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상황이 바뀌어도 기존의 관행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교회의 경우, 특히 누구에게나 필요로 하는 사랑과 나눔으로 유명했던 초대교회를 생각해 볼 때, 그 관계가 어떻게 상호 의존적으로 변할 수 있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상호 의존적 관계는 양쪽 모두에게 “유익”이 있습니다.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신의 상황을 변화시키고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베푸는 사람 입장에서는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으로 기분이 좋아질 수 있고 (이타주의) 때로 자신이 돕고 있는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갖을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자신을 기분 좋게 만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먹지 말라고 말할 때, 먹을 것을 주고 싶은 사람에게 그들의 도움이 정당한지, 그리고 다른 사람을 돕는 자신의 내면의 동기를 검토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교훈이 필요했던 이유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가능성은 아마도 당시의 일반적인 관행일 수 있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 곧 후원자는 수혜자들의 네트워크 또는 자신의 추종 세력을 구축하기 원했습니다. 정치적 또는 시민적 봉사에 대한 대가로 후원자는 고객이 일하지 않고도 먹을 수 있도록 음식을 제공했습니다. 따라서 수혜자는 자신을 위해 일하기보다 후원자를 위해 일하는 데 더 분주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 문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신의 후원자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당신이 해야 하는 일 중 일부가 신앙심과 도덕성에 쉽게 모순되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수혜자는 이방 신전에 가서 후원자를 대신해 신에게 희생을 바치라는 부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는 후원자가 다른 지역에 있거나 다른 행사에 참석하는 동안 지역 사회에서 그의 사회적 지위 유지를 위해 이방 신전의 제의 식사에서 후원자를 대표하라는 부탁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예를 통해 당시의 후원자-수혜자 시스템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후원자-수혜자 시나리오의 문제를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목격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가 11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 유희를 생각해 보십시오. 문제의 이 바쁜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할 의향은 없지만 다른 사람의 일에 기꺼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본문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단어도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의 일원이며, 믿는 이들의 공동선에 기여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동시에 일이라는 것이 선하다는 것과 선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돈 버는 방법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일이 게으름을 기반으로 하고 있거나 우리의 복지(our own well-being)를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고 있을 때, 그러나 우리가 더 잘 할 수 있고 더 많이 할 수 있는 경우라면 이런 상황들을 재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회사가 취약한 사람들의 것들을 의도적으로 착취하고 있는 경우는 어떻습니까? 바울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선을 행하는 데 힘쓰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일상에서 삶의 방식을 통해 선택해 나가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반영해야 합니다.
일러스트레이션 아이디어
Brene Brown은 그녀의 책 Daring Greatly를 루스벨트 대통령의 인용문으로 시작합니다. “중요한 것은 비평가가 아닙니다. 강한 자가 어떻게 걸려 넘어지는지, 또는 행하는 자가 어떻게 하면 그것을 더 잘할 수 있었는지 지적하는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경기장에 있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그의 얼굴은 먼지와 땀과 피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는 용감하게 투쟁하고 있습니다. 실수와 부족함이 없는 어떤 노력도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나 실수하고 누구나 계속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위대한 열정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위대한 헌신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그 일에 자신을 바치는 사람입니다. 수준 높은 성취가 주는 승리를 알고 있거나, 아니면 실패하더라도 적어도 대담하게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경기장에 있는 사람”이었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려고 노력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헌금을 받는 대신 밤낮으로 기꺼이 일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생활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잘 드러내는 하나의 실례입니다. 그의 말은 들을 가치가 있고, 그의 삶은 배울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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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후서 3:6-13 주석